그 많던 여배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올해 상황은 더 심각하다〈그래픽〉. 영화에 출연하더라도 끝나고 나면 기억에 잘 남지 않는 남자 배우 곁의 주변적 역할에 그친다. 여배우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고, 만들어지더라도 흥행이 안 된다. 흥행에 실패하니 여배우 주연작이 더 나오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다. 반면 외국 영화들은 여전히 '여배우 원톱'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흥행 성적도 준수하다.
◇여배우 주연 영화가 사라졌다
출연만으로 관객을 끄는 '티켓 파워'를 갖춘 우리 여배우는 손예진·전지현·김혜수 등 이미 30·40대. 그나마 손예진의 작년 주연작 '덕혜옹주' 이후 이들이 홀로 주연한 흥행작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올해 외화의 경우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장수 액션 시리즈물 '레지던트 이블: 파멸의 날'이 국내 77만 관객을 모으며 선방했다. 스칼릿 조핸슨 주연의 SF 액션물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 76만명, 에이미 애덤스 주연의 철학적 SF영화 '컨택트'도 63만명을 모으며 체면을 세웠다. 세계시장에선 '공각기동대…'가 1억6764만달러(약 1899억원), '레지던트…'가 3억1224만달러 매출을 올렸다. 반면 우리 영화의 경우엔 흥행과 비평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강예원 주연의 코미디 '비정규직 특수요원'은 신선한 소재와 시도에도 관객 선택을 받지 못했고, 김윤진 주연의 '시간 위의 집' 역시 오랜만에 보는 웰메이드 공포영화로 기대를 모았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김새론·김향기 두 어린 여배우 주연의 일제강점기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이야기 '눈길'이 저예산 영화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 그나마 수확이다.
◇'주체'아닌 '주변'이 된 여배우들
'공조' '더 킹' '프리즌' '재심' 등 올해 주요 흥행작에서 여배우 역할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할다운 역할을 맡았던 여배우는 '조작된 도시'에서 자폐적 해커로, '특별시민'에서 아직 세상 물이 덜 든 정치 마케팅 전문가로 출연했던 심은경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남녀 배우가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로 넓혀 봐도 마찬가지. 외화의 경우 올해 박스오피스 1위인 '미녀와 야수'(에마 왓슨과 댄 스티븐스)를 비롯해 '패신저스'(제니퍼 로렌스와 크리스 프랫), '얼라이드'(마리옹 코티야르와 브래드 피트) 등이 있었다. 판타지, SF, 첩보물 등 장르도 다양하다. 영화 속 여성의 역할에서도 차이가 난다. '미녀와 야수'에서 에마 왓슨이 연기한 '벨'은 가난한 시골 처녀가 왕자를 만나 행복해지는 전형적 중세 동화의 틀을 깨고 자기 의지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새로운 여성형으로 묘사됐다. 반면 우리 영화는 가족 코미디 '아빠는 딸'(정소민과 윤제문)과 로맨스물 '어느 날'(천우희와 김남길)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다양성 실종… 제작 관행 보수화 한몫
여성 관객 비율이 높고 남성 배우를 선호하는 현상은 우리 영화 시장의 오래된 특징. 그럼에도 최근의 '여배우' 실종은 우려스럽다. 영화 시장 분석가 김형호씨는 "무엇보다 우리 영화에 장르 다양성이 실종된 탓"이라고 지적했다. "대형 투자 배급사들이 제작비 큰 대작을 만들어 성수기에 '한방 경쟁'을 벌이는 구조다 보니 중저 예산 액션물이나 로맨스·멜로 등 다양한 영화에 대한 모험적 투자와 개발이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배우 주연이 가능한 멜로 영화 실종이 치명적이다. 양경미 영화평론가(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는 "외모와 재능, '끼'를 갖춘 젊은 여성 연예인 지망생들이 배우보다는 'K팝 아이돌'이 되기를 선호하는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김형호 분석가는 "결국 중저 예산 규모의 다양한 장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 영화계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도 여배우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