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 통했다, 藥봉지로 보듬은 시대의 상처

    입력 : 2017.05.02 03:02

    [벨기에서 개인전 여는 전광영 화백]

    보고시앙재단 첫 개인전 초대
    옛 한약방을 현대미술로 구현… 아픔·치유 함께 담은 韓紙조형물

    아트 페어서 인기 끌며 無名 청산… 실베스터 스탤론이 3억에 구입도

    시작은 사소했다. 강원도 홍천 큰할아버지의 한약방. 그 빛바랜 풍경이 떠오른 건, 돌아보니 '운명'이었다.

    "진사 모자에 흰색 모시 적삼 차려입고 환자 진맥 보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더없이 근엄해 보였죠. 약봉지에 초서로 처방전을 휘갈겨 쓰시고는 노끈으로 다섯 개씩 묶어서 주면 아낙들이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데, 그 풍경이 화가로서 가장 절박한 처지에 놓였을 때 떠오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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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벨기에 전시를 앞두고 경기도 판교 작업실에서 만난 전광영 작가. 한지 조형물 색감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건“내가 나이를 먹기 때문”이라며 활짝 웃었다.‘ 빌라 엉팡’전시는 8월 13일까지 열린다. /이진한 기자
    삼각으로 자른 수천 개, 수만 개 스티로폼을 약봉지인 양 한지로 하나하나 싸서 끈으로 동여매는 '노동'을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세모, 네모로 정교히 박아넣고 때로는 돌출시켜 일궈낸 거대 조형물은 50대 무명 화가였던 전광영(73)을 세계 아트페어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렸다. 한지(韓紙), 그중에서도 옛 사람들 손때가 묻은 고서(古書)의 낱장으로 쌓아올린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이야기'에 서구 컬렉터들이 열광했다.

    이달 17일부터는 보고시앙재단 초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의 유서 깊은 전시장 '빌라 엉팡'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세계적 문화 후원 단체인 보고시앙은 2015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단색화'전을 주최, 1970년대 한국 단색화 거장들을 국제무대에 소개한 주역이다. 전광영 전시는 재단 아트 디렉터이자 베네치아·휘트니비엔날레, 테이트모던·구겐하임미술관 등에서 큐레이터로 명성을 높인 아사드 라자가 기획한 것으로, 보고시앙재단이 그룹전 아닌 한 명의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고서(古書)로 감싼 삼각 약봉지를 붙이고 쌓아올리는 전광영 작품은 시간의 무게, 노동의 흔적과 더불어 예스럽고도 낯선 감흥을 일으킨다.
    고서(古書)로 감싼 삼각 약봉지를 붙이고 쌓아올리는 전광영 작품은 시간의 무게, 노동의 흔적과 더불어 예스럽고도 낯선 감흥을 일으킨다. /전광영 스튜디오
    5월 전시를 앞두고 경기도 판교 작업실에서 만난 전광영은 무명 시절을 추억했다. "홍대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가서 아방가르드, 새로운 추상표현주의를 배우고 돌아왔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고요. 인사동에 내로라하는 화가들 전시 현수막은 크게 걸렸는데 내 작품 소개하겠다는 화랑은 없었으니까요. 100m 달리기로 1등 할 수 없다면 마라톤으로 승부를 걸자, 했지요."

    한약방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약봉지의 추억이 전환점이 됐다. 학원 선생으로 겨우 생계를 잇던 무렵이다. "감기로 지독히 아팠던 어느 날 약탕기, 보자기 같은 옛 한약방 풍경이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나를, 우리 민족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였어요. 역사의 아픔과 균열, 그러나 치유와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스티로폼 잘라 한지로 싸고 묶는 작업을 두고 화단에선 "미쳤다"고 했다. 평론가 이일(작고)만이 '언젠가 사고 한번 치겠군' 했을 뿐이다. 1997년 박영덕화랑과 함께 나간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진짜 사고를 쳤다. 구식의 삼각 약봉지로 빚어낸 새로운 미감(美感)의 조형물을 보려고 관람객이 줄 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유엔본부와 록펠러재단, 호주국립현대미술관, 런던 빅토리아&알버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2년 전엔 할리우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미국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린 아트 바젤에서 전광영 작품 두 점을 29만달러(약 3억4000만원)에 구입했다. 캘리포니아대 미술사학과 교수인 존 웰치만은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 작품이 어린 시절 학대와 연관된 환각 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전광영의 주머니(삼각 봉지)는 건강한 노스탤지어로 물든 역사적 순간에 대한 모방적 수행이었다"고 썼다.

    이번 전시에는 '집합(Aggregation)'이란 제목의 한지 연작 초기부터 후기작을 두루 볼 수 있는 평면과 설치 14점이 걸린다. 고졸한 옛 정취 물씬한 90년대 작품에서 화사한 색감과 다양한 입체로 변모해가는 최근작이 대비를 이룬다. "나이를 먹나 봐요. 내 마음을 꽃단장하고 싶은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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