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유강은 옮김
교유서가|680쪽|3만5000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7일(현지 시각) 로이터 통신과 취임 100일을 앞두고 인터뷰하며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방위비 분담금 10억달러(약 1조원)를 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면서 미국 대통령에 누가 선출되느냐는 국제적 관심사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뽑아 혈맹인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가.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가 1963년 펴낸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그런 미국인의 정신상태를 탐구하는 책이다. 요즘 말로 '판도라의 상자'다. 우연히 연인 스마트폰을 보다가 문자메시지와 SNS에서 원치 않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한다. 미국의 불편한 진실을 추적하는 이 책이 그렇다.
미국인은 어떻게 사고하는가. 저자는 먼저 그 특징으로 미국 종교계의 '부흥주의'와 '원시주의' 전통을 지적한다. 1743년 3월 미국 코네티컷 뉴런던에서 목사들의 저서와 설교집이 불길에 휩싸였다. 지성적인 교계가 신의 뜻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한 제임스 대븐포트 같은 부흥주의 전도사(evangelist)가 이를 주도했다. 비슷한 화형식은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잇따랐다. 이들은 "설교할 자격은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 말뿐인 지식이나 교양이 필요한 게 아니다. 설교는 성령께 받은 감동으로 말이 입을 뚫고 나온 결과"라고 주장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을 떠올리게 하는 분서(焚書)가 18세기 미국에서 벌어졌다. 이들은 학습한 이성보다도 신이 주신 직관을 신뢰했다는 점에서 원시주의적이다.
시곗바늘을 조금 후대로 돌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그들은 전도사 빌리 선데이에 열광했다. 그는 설교 중에 의자를 부수고,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 삿대질을 하며 크게 꾸짖었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서커스 단원을 고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벽돌공의 아들, 무명 야구선수 출신의 그에게 대중은 홀딱 반했다. "부흥회에서 1명당 2달러밖에 못 벌었어"라고 말할 정도로 돈을 밝혔고, 목사 안수를 정식으로는 받지 못할 정도의 지식수준이었지만, 대중은 그를 사랑했다. 미국인에게 지성은 그리 큰 매력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교회가 아니라 미 전역을 도는 개척가적 면모와 사업가 정신을 발휘하며 평생 환대받았다.
이는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련되었지만 타락한' 유럽 문명과 자신을 구분하면서 평등주의적으로 세워졌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단순 연상을 해보자. 지식인, 교육, 특권, 귀족, 유럽식 귀족정치. 대중, 무지, 평등, 미국식 민주주의. 지성은 타락한 유럽의 것이었고 평등주의는 엘리트가 권력을 잡는 것을 견제했다. 지식인에 대한 비합리적일 정도의 경멸과 반감을 가지는 반지성주의야말로 미국 문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1950년대 미국 지성 사회가 한 몸이 되어 지지했던 아들라이 스티븐슨은 군인 출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물을 먹었다. 비슷한 시기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다. 저자는 "매카시즘은 반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라 반지성주의 운동"이라고 썼다. 책이 나온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거듭 고개를 들었다. 미국 대중은 엘리트 앨 고어 대신 친근한 조지 W 부시를 선택했고, 원시주의, 지성에 대한 경멸, 성공 일변도의 사업가 정신을 체현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반지성주의는 미국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국민의 평등을 전제하는 민주국가, 신 앞에 평등을 전제하는 종교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미국을 읽는 책이면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퓰리처 논픽션 부문 수상작(1964년)이자, 고전(古典)으로 꼽히면서도 트럼프가 부상한 뒤에야 번역된 데는 책 자체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 미국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미국 18세기 종교 부흥주의와 각성 운동에 대한 내용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 생소한 부분이다. 역대 주요 미국 대통령 이름과 주요 정책은 알아야 이해가 쉽다는 부분도 문턱을 높인다. 반지성주의를 1952년 '계란머리(egghead·그럴듯한 지적 허세를 부리는 대학교수 등을 비꼬는 속어) 논쟁' 같은 미국적 사례를 통해 느슨하게 정의하는 대목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