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 선천성 심장병 수술에 필요한 인공혈관을 국내 공급하는 외국계 회사가 "한국의 건강보험 수가(酬價)가 너무 낮다"며 인공혈관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흉부외과 의사들은 "인공혈관 대체재가 없어 소아 심장병 환자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건강보험 수가 낮아 수입 중단"

27일 흉부심장혈관학회 등에 따르면, 국내에 인공혈관을 공급해온 미국의 고어사(社)가 최근 메디컬 사업부를 전면 철수하기로 했다. 이미 직원들을 정리한 상태이고, 수입 중단 신고 절차를 진행 중이다. 고어 의료용품 전체를 국내에 9월까지만 공급하고 더 이상 판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 공급되는 소아용 인공혈관은 고어 제품이 유일해 재고가 떨어지면 소아 심장 수술 대란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각 병원에선 재고 확보 경쟁도 이뤄지고 있다. 매년 3000~3500건 이뤄지는 소아 심장 수술 가운데 약 300건에 인공혈관이 사용된다. 직경 3.5~6㎜인 인공혈관은 선천성 심장 기형을 교정할 때, 심장 동맥 부위와 폐를 연결하는 데 쓰인다.

고어사에서 메디컬 사업부를 담당했던 이모씨는 "최근 인공혈관 등 치료용품에 대한 건강보험 수가가 최대 20% 깎이면서 전반적으로 수익성이 떨어졌다"면서 "본사에서 한국 시장에 비전이 없다고 보고 메디컬 사업을 아예 접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대만, 일본 등에서 '한국에는 제품 가격을 낮게 공급하면서 왜 우리에게만 비싸게 파느냐'는 항의가 들어온 것도 부담이 됐다"고 고어 측은 전했다.

대한흉부심장혈관학회 심성보(가톨릭의대 교수) 이사장은 "현재 각 병원이 인공혈관을 확보하려고 비상이 걸린 상태"라며 "치료재가 없어서 환자들이 수술을 못 받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학회는 또 "의료 사업 종사 기업 윤리에 맞지 않는 결정이므로 재고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고어 본사에 보내기로 했다.

최신 의료기기 도입도 늦어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 부정맥학회가 열렸다. 한국 심장내과 의사들이 주최한 국제 행사지만, 최신 의료기기를 국내 환자에게 적용해 치료 성과를 낸 논문 발표는 한 편도 없었다. 외국계 회사들이 최신 제품을 개발했으면서도 건강보험 책정 수가가 낮다는 이유로 국내 공급을 꺼리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일본이나 홍콩에서는 부정맥 치료용 4세대 카테터(혈관 내 삽입 도자)를 쓰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2세대에 머물러 있다. 보건 당국이 4세대 최신 장비도 기존 2세대와 같은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아예 수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심장박동 이상 환자에게 전기 자극 장치를 심장 옆에 심어서 심박동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도 여러 채널을 동시에 자극하는 최신 기기들이 수년 전부터 나와 있지만, 국내엔 건강보험 수가 문제로 들어와 있지 않다. 이처럼 국내에 없는 최신 장비가 심장 분야에서만 7~8개에 이른다고 학회는 전했다. 의료계에서는 단기적으로 건보 재정을 아낄 수 있으나 결국 환자들이 좀 더 나은 치료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최신 임상 기술에서도 뒤처지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태부정맥학회 김영훈(고려대의대 심장내과) 대회장은 "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환자에게 이득이 되고, 임상 기술 발전도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정통령 보험급여과장은 "환자에게 꼭 필요한 기기라면 사전에 수가 조정을 협상해 오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면서 "소아 심장 수술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관련 기관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