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able] '팔뚝 힘'으로 만들어낸 부드러운 머랭… 달콤쌉쌀 초콜릿과 만나다

    입력 : 2017.04.26 03:05

    [남자의 연장] '베이킹 필수품' 스테인리스 거품기

    달걀 흰자를 거품기로 십여 분 휘저어야 새하얀 머랭 나와
    중탕한 초콜릿에 섞으면 '프렌치 디저트' 초콜릿 무스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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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웃었다. 오른 손목 전완근이 저리기 시작할 때쯤 달걀 흰자 거품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박상현 기자(오른쪽)가 수작업으로 머랭을 치고 있다. 전동 거품기를 든 최연정 셰프가 이 광경을 재밌게 바라보고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 그것보다 초콜릿이 좋다고 하셨다.

    지난 주말 어머니와 알폰소 아라우 감독의 1992년 작(作)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봤다. 원작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Like water for chocolate'. 직역하면 '초콜릿을 끓이는 물처럼'이지만 멕시코에선 성(性)적으로 몹시 흥분한 상태, 이를테면 '후끈 달아오른 몸' 정도를 뜻하는 관용구다. 주인공 티타와 페드로의 뜨겁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가르사 가(家)의 막내딸인 티타는 결혼 못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막내딸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보살펴야 한다'는 괴팍한 멕시코 전통 때문. 비극적 사랑의 시작이 으레 그러하듯 첫 만남에 그녀와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진 페드로는 티타 곁에 머물고 싶어 안달복달하다가 그녀의 못생긴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한다. 정인(情人)을 언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티타는 사랑과 기만, 열정과 분노가 뒤범벅된 제 감정을 요리에 투영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렇게 적는다. "그날부터 티타의 영역은 부엌이 되었다."

    문학에서 초콜릿은 종종 '사랑과 정열'이라는 인간 감정의 은유로 쓰인다. 당도를 높이면 머리 지끈거릴 만큼 달콤하지만, 설탕을 빼버리면 크레파스 씹듯 쓰디쓴 그것. 달콤함과 씁쓸함의 적정을 잘 잡아내야만 좋은 초콜릿, 괜찮은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도 기분이 아주 좋거나 꿀꿀한 날이면 찬장에서 고디바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에 넣곤 했다. "기쁜 날은 단맛이, 화난 날은 쓴맛이 당겨서 그렇다"고 했다.

    어버이날 초콜릿 한 상자를 선물할까 하다가(돈 봉투는 별도다) 초콜릿으로 요리를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싶었다. 감정 표현 서툰 아들 때문에 어느 날 서운했을 마음을 단맛으로 풀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프렌치 쿠킹 스튜디오 '아틀리에 15구'를 운영하는 최연정 셰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최 셰프는 "팔뚝 힘만 있으면 요리 서툰 남자도 쉽게 만드는 디저트가 있다"면서 '초콜릿 무스'를 추천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녹여줄 부드러운 디저트. 연장은 '스테인리스 거품기' 하나면 충분했다.

    10분 만에 만드는 고급 디저트

    무스(mousse)는 '거품'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크림이나 달걀흰자에 거품을 내 초콜릿·레몬 등 다른 재료와 섞어 차갑게 식힌 것이다. 문헌에 최초로 기록된 '초콜릿 무스'는 루이 16세와 나폴레옹의 전속 요리사였던 알레상드르 비아르가 1820년에 펴낸 요리백과 '왕실 요리사의 요리 기술'. 이후 1857년 편찬된 '프랑스어 사전'에 정식 단어로 등재됐다.

    무거운 식감의 다크 초콜릿과 가벼운 식감의 달걀흰자 거품을 섞어 만드는 오늘날 무스는 19세기 말 프랑스 화가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착안한 것이다. 그는 이 레시피를 개발하면서 '마요네즈 같은 초콜릿'이라는 뜻의 '마요네즈 드 쇼콜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왕실에서 먹던 이 디저트는 193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고, 1970년대엔 고급 레스토랑 단골 디저트로 이름을 날린다.

    역사와 전통이 깃든 디저트지만, 조리법은 간단하다. 재료는 달걀 2개, 초콜릿 바 1개가 끝이다. 집에서 마시던 럼주 한 스푼이나 레몬 제스트(레몬 겉껍질을 얇게 잘라내 다진 것)를 넣어 얼마든지 변주할 수도 있다. 맛을 좌우하는 건 초콜릿. 트렌치코트 속에 얼굴 파묻던 20대 이미연을 추억하며 그 밀크 초콜릿을 샀다간 요리를 망친다. '다크 초콜릿'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는 초콜릿이나 카카오 함량이 55% 이상인 초콜릿을 써야 한다.

    손으로 잘게 부순 초콜릿을 스테인리스 볼에 넣고 가스불에 올려 중탕으로 녹인다. 가스레인지가 두렵다면 전자레인지용 그릇에 넣고 랩을 씌워 전자레인지에 3~4분 정도 돌린다. 달걀 2개는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다. 녹은 초콜릿에 달걀노른자를 섞는다.

    '낳으실 제 괴로움' 투영해 만들어낸 거품

    '초콜릿 무스'의 성패는 지금부터 갈린다. 다른 스테인리스 볼에 두 알의 흰자를 넣고, 삼두근과 전완근에 바짝 힘을 주어 미친 듯이 휘젓는다. 미끌미끌한 흰자가 공기와 접촉해 풍성한 거품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정신없이 젓는다. 쉬지 않고 5분쯤 젓다 보면 전완근에 마비가 오면서 살짝 고개를 내민 거품과 마주한다. 팔을 잃을 각오로 더 젓다 보면 볼을 거꾸로 뒤집어도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점도(粘度)가 생긴 거품이 탄생한다. '낳으실 제 괴로움' 공감하면서 만들어낸 이 거품은 각종 디저트의 기본이 되는 '머랭(meringue)'이다.

    이 머랭을 노른자와 섞어둔 초콜릿과 다시금 섞는다. 거품이 부서지지 않도록, 우는 아기 달래듯 살살 섞어준다. 집에서 마시던 럼주 한 스푼을 넣고 마지막 주걱질을 해준 뒤 머그컵에 옮겨 담는다. 어머니가 취미로 기르는 박하잎을 몰래 따 대지를 연상시키는 '초콜릿 땅'에 심으면 데코레이션이 끝난다. 냉장고로 들어가 30분쯤 열을 식히고 나면 혀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릿 무스'가 완성된다.

    이제 어버이날 곁들일 코멘트를 암기하자.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는 흙색을 띤다. 그래서 고대 마야인과 아스텍인들은 카카오를 생명의 근원인 대지와 닮았다고 여겼고, 다산(多産)의 여신과 맺어졌다고 믿었다. 오래전부터 카카오는, 그리고 초콜릿은 '어머니'였던 것이다." 부드러운 식감이 어머니 마음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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