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나는 파리의 여행가이드

    입력 : 2017.04.25 03:06

    예술의 도시 파리에 갔더니 예술 뺨치는 가이드 나왔네
    입만 열면 세잔, 피카소라 따분하고 하품만 나는데
    정치보다 예술이 귀한 이유… 이 멋쟁이 청년 덕에 알았네

    김윤덕 문화부 차장
    김윤덕 문화부 차장
    샤를 드골 공항으로 마중 나온 '미스터 준'은 멋쟁이였다. 감색 중절모에 머플러, 폭 좁은 코듀로이 바지에 갈색 구두를 신었다. 중절모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내릴 땐 지단 스타일로 화끈하게 민 두상이 보였다. 파리를 '빠흐리'로 발음하는 건, 파리지엔으로 20년을 산 남자의 고집이자 자부심인 듯했다. '빠흐리'에선 '봉주르'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고도 했다. "자, 따라 해볼까요? 입꼬리가 귀에 걸릴 때까지 웃으면서, 봉추~으~르!" 언변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그가 버스가 출발하기 전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유능한 가이드는 잠이 솔솔 오게 이야기한다지요? 저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겠습니다."



    농담이 아니었다. 버스 출발한 지 30분도 안 돼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준의 안내가 엉성하거나 불성실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격이 너무 높은 게 탈이었다. 에펠탑을 지날 땐 "저 괴물 같은 철탑이 보기 싫어 매일 점심을 탑 밑에 들어가 먹었다는 모파상의 문학세계"를 두고 20분 열강했다. 777㎞ 길이 센 강엔 37개 다리가 있다고 설명하다 말고, 홍수로 강이 범람할 위기에 처하자 루브르박물관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에 대해 또 20분을 웅변했다. 누군가 파리에 지천으로 나뒹구는 쓰레기를 지적하자 이번엔 피카소로 넘어갔다. "피카소가 열세 살 때 미켈란젤로를 섭렵한 건 아시지요? 이 천재가 바바리코트 입고 산책을 나서면 돌아올 때 양쪽 주머니가 불룩해져 있었답니다. 버려진 병뚜껑, 돌멩이, 벤치에 펄럭이는 신문지까지 죄다 주워와서는 캔버스에 붙인 거지요. 쓰레기를 예술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행 이틀째부터 손님들은 아예 의자 등받이를 뒤로 눕혔다. 미스터 준이 대놓고 미술사 강의를 한 탓이다. "세잔은 왜 허구한 날 사과를 그렸을까요?" "르누아르를 왜 인상파라고 부를까요? 인상을 많이 써서?" 하고 물어대니 눈 붙이고 자는 게 속 편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준이 아니었다. '19금(禁)'으로 전략을 수정, 남심(男心)을 공략했다. "만 레이 사진 '앵그르의 바이올린' 아시죠? 프랑스 최초의 누드모델인 무희(舞姬) 키키는 레이의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옷 벗고 등을 돌려 앉은 포즈로 키키를 찍는데, 맘에 안 드는지 머리에 터번을 둘러보라고 주문합니다. 지겨워진 키키가 '아, 이제 그만 찍고 뽀뽀나 하자니까~'라고 말하려는 순간, 셔터를 힘차게 누른 거지요. 이 한 컷이 사진의 역사를 바꿉니다. 키키의 허리에 화룡점정으로 찍은 바이올린 f홀과 함께 말이지요."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나는 파리의 여행가이드
    /이철원 기자


    미스터 준이 '정체'를 밝힌 건 버스 안에 돈 매클린의 "스타리 스타리 나잇(Starry Starry Night)~"이 흘러나왔을 때다. "가난과 격정 속에 살다 서른일곱에 자살한 고흐를 추모하는 이 노래를 들으면 목울대가 뜨거워져요. 제 꿈도 화가였거든요. 파리로 왔지만 그 꿈 이루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파리가 향수 냄새보다 지린내가 더 진동하는 도시라는 걸 깨닫는 것만큼이나 오래 걸리지 않았죠. 고흐가 살아 있다면 소주 한잔했을 텐데요." 여행 마지막 날 예정에 없던 피카소미술관으로 향한 건 이 집요한 가이드에게 등 떼밀려서다. 다행히 피카소가 사랑했던 일곱 여인 중 가장 어여뻤다는 올가의 그림 앞에서 남자들 눈이 빛을 뿜었다. 그중 하나는 "피카소가 사람 이름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며 뿌듯해했다. 피카소의 '붉은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누드'를 지그시 바라보던 미스터 준이 물었다. "피카소의 모든 사랑은 진실이었을까요?" 목감기로 콜록이던 50대 여자가 일행을 대표해 답했다. "사랑은 개뿔!"



    공항 가는 길, 미스터 준은 가이드 20년에 이렇듯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룹은 처음 봤다고 과장했다. 다시 파리에 오면 모네의 수련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마르모탕미술관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만든 케브랑리박물관에 꼭 가보시라고도 했다. 누군가 휴일엔 뭘 하느냐 물었다. "철학을 전공한 프랑스 여자 친구와 센 강변을 걸으며 예술에 대해 토론해요. 따끈한 커피에 뺑오쇼콜라를 씹으면서요." 손님들이 혀를 내두르자, 준이 덧붙였다. "프랑스도, 한국도 대선(大選)이 한창입니다만 저는 정치인보다 예술가를 신뢰해요. 적어도 예술가는 전쟁을 일으키진 않으니까요. 뜬구름 잡을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니까요." 사랑은 개뿔이라던 여인이 대뜸 '뺑오쇼콜라'가 뭐냐고 물었다. "초콜릿 스틱이 두 개 박힌 크루아상! 악쓰고 울던 아이도 이걸 물려주면 뚝 그칠 만큼 달콤하지요. 한국의 곶감이라고 할까?" 개뿔 여인이 중얼거렸다. "이번 여행에서 들은 얘기 중 가장 실속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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