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격변하던 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대비했기 때문에 삼국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놀라울 정도로 인내를 발휘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예측하여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한국연구재단이 10년째 진행하고 있는 석학인문강좌의 올해 첫 강사로 초청된 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한국고대사)의 '삼국통일전쟁과 그 영향' 연속 강연이 22일 서울교대 종합문화관에서 임기환(한국고대사) 서울교대 교수, 김명섭(정치외교학) 연세대 교수와의 대담으로 마무리됐다. 2008년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출판부)를 출간한 노 교수는 지난 1일부터 3주 동안 매주 토요일 삼국통일전쟁의 전개, 신라·당 전쟁과 신라·일본 관계, 삼국통일전쟁이 남긴 유산을 차례로 강연했다.

삼국통일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에 주는 교훈을 토론하는 노태돈(가운데), 임기환(왼쪽), 김명섭 교수.

노태돈 교수는 '동맹국'이었던 당(唐)과 '적대국'이었던 일본을 다뤘던 신라의 외교술을 높이 평가했다. 660년 백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 경험을 잊지 않은 신라는 8년 뒤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모색했다. 당의 침공에 대비해 후방을 안전하게 한 것이다.

임기환 교수는 "신라의 당초 목표가 삼국 통일이 아니라 백제 병합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붙인 삼국통일전쟁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노태돈 교수는 "전쟁의 발단은 백제와의 갈등이었지만 전개 과정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도 성격이 확대됐다"며 "또 전쟁이 삼국의 동질성을 자각시키는 계기가 됐고 대당(對唐)항쟁을 통해 동족 의식이 높아졌으며 전쟁 이후 '삼한일통(三韓一統)' 관념이 대두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전쟁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임 교수가 8세기 이후 한국사 시대 명칭이 '통일신라와 발해' '남북국 시대' '후기신라와 발해' 등 다양하게 사용되는 데 대한 견해를 묻자 노 교수는 한국사 속에서 신라와 발해의 비중이 크게 차이 나고, 발해가 망한 다음 고려로 건너온 사람이 발해 인구의 10%가 안 된다는 점을 들어 "'남북국시대'보다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맞는다고 본다"고 답했다.

김명섭 교수는 "중국은 수·고구려 전쟁, 당·고구려 전쟁을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내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중화민족' 개념을 과거에 투사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아닌지"라고 물었다. 노태돈 교수는 "역사는 당시 실재하지 않은 개념이 아니라 그때의 객관적 상황에 입각해 설명해야 한다"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중국이 현재 통치하는 영토의 역사는 모두 자국사라는 중국 정부 입장)을 확대해 과거에 중국이 통치한 영역까지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에 대해서 노 교수는 "조공책봉 관계를 의미한 것 같은데 전근대 시기 한·중 관계를 설명하는 '속국(屬國)'은 주권의 제약을 받는 종속국을 의미하는 근대적 개념이 아니라 내정(內政)과 외교(外交)의 자율성을 보장받았고 그것이 침해될 때는 저항했다"고 말했다.

대담이 끝나고 청중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졌다. 신라·백제·고구려의 언어가 동일했는지를 묻는 질문이 여럿 나왔다. 노태돈 교수는 "삼국의 영토가 교차되는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삼국 사람들 사이에 생활 양식이 비슷해지고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고 답했다. 삼국 통일을 위한 신라의 국제정치 전략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을 묻자 노 교수는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힘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며 "이런 자주적 태도는 어려운 문제는 '큰집'에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안일하게 대처했던 후대의 사대주의자들과 크게 달랐던 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