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고모의 낡은 주판

  • 김상규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자

    입력 : 2017.04.21 03:03

    김상규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자
    김상규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자
    고모는 야간 상고를 다녔다. 고모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중고 대여점에서 빌려온 클로버 타자기와 중학생 때부터 쓴 낡은 주판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고모는 매일 저녁 책상에 앉아 타자와 주산 연습을 했고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잠을 설쳤다.

    여느 상고생처럼 은행이나 우체국에 취직하는 게 고모의 꿈이었다. 고모가 대구의 한 우체국에 취직했을 때 자신이 모은 돈으로 새 타자기를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향 제주에서 대구로 가던 날 고모는 옷가지와 타자기를 들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돈 많이 벌어서 멋지게 돌아올게. 그때까지 건강해야 한다."

    더는 타자기와 주판이 쓰이지 않게 됐을 때 고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고모는 내가 알고 있던 고모가 아니었다. 심한 정신분열증, 즉 조현병을 앓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식욕을 조절하지 못해 몸은 불어 있었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부수며 욕하는 게 일과였다.

    하루는 잠든 고모 머리맡에 주판을 놓고 나왔다. 옛 기억이 조금이라도 돌아오길 바라면서. 하지만 고모는 주판으로 손쉬운 셈도 하지 못했고, "효자손으로 쓰기 좋겠다"며 등이나 긁고 있었다. 병동에 있는 고모 면회를 마친 뒤 작은 주판을 간호사에게 건넸다. "혹시 고모의 상태가 좋아지면 선물로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일사일언] 고모의 낡은 주판
    달라진 고모를 '가짜'라 생각하고 미워한 적이 있었다. 옛날처럼 돌아와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지금 고모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뭘까. 고모는 누군가 그 답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혼자만의 시간에서 시위하는 중인지 모른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나는 고모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다. 과거는 가고, 풍경은 바뀌어도 고모는 여전히 내 고모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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