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편지] 사교육에 파김치돼 쓰러진 손주들을 보며

  • 이정원 시조시인

    입력 : 2017.04.21 03:08

    이정원 시조시인
    이정원 시조시인

    손자가 둘, 외손녀가 둘 있습니다. 넷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네 손주를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불쌍하다'는 것이고, 다음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녀석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열 식구가 자주 식사할 만큼 왕래가 잦았습니다. 커 가는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할머니로서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그런데 큰아이는 고등학생이 된 후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어렵습니다. 하교 후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내가 아들네 집으로 가서 파김치가 돼 쓰러진 모습을 보는 게 고작입니다. 한 아파트 1층과 15층에 살면서도 이 지경이니,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 사교육 실태는 상상 이상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해 총사교육비가 30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연간 R&D 예산이 19조원임에 비교하면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외망국론'이 나올 만합니다. 어느 중학생이 "하루에 최고 18시간까지 공부해야 한다"며 불평하는 것을 TV에서 본 적 있습니다. 바른 품성과 지혜를 익히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며, 미래에 대한 흥미를 가져야 할 청소년기를 이렇게 시험에만 매달리니 '입시망국론'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손주들 사교육 좀 줄여라"라고 훈수를 둘 수도 없으니 고민입니다. "다들 시키는데 우리 애들만 안 시켜서 손해 본다면 책임지실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DB
    두 아이 사교육비가 부족해 늘 절절매는 아들 내외를 지켜보자니 이 나라의 교육정책이나 부모의 현실관 중 적어도 어느 한 쪽은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88%가 사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핀란드 청소년은 "사교육이 무어냐"고 되묻는다는데, 그 나라가 우리보다 못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많은 책을 읽고,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밝은 미래를 꿈꿔야 할 청소년이 창의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주입식·암기식 공부에 허덕이는 현실을 보면 나라의 장래가 암울할 뿐입니다.

    어느 대기업 사장은 "기업은 '참치'급 인재를 원하는데 사교육은 '잡어'만 키운다"고 탄식했습니다. 서울대와 모스크바 국립대를 졸업한 엘리트는 취업을 위해 전문대에 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육과 사회의 희극 같은 현장입니다. 작가 조정래가 "아이들에게 사교육 폭탄을 돌리지 말라"고 며느리에게 강력 경고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부럽다 못해 신기합니다.

    지금 중학생들이 40대가 되면 4차와 5차 산업혁명으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아무 쓸모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 격변의 시기에 죽기 살기로 일류대 진학에 목을 매는 교육, 부모와 자녀가 '2인3각' 선수로 뛰며 과도한 교육비에 가정과 나라를 골병들게 하는 병폐를 고치지 않는 한 미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금수저론, '돈도 실력'이라는 비뚤어진 운동장론을 적잖은 학생과 부모가 수용하는 세태도 한시 바삐 뜯어고쳐야 합니다.

    '달달 외워 만든 정답'이 아니라 '상식과 능력에 뿌리를 둔 정답'이 통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한 학생이 사교육이 모자라 성공할 수 없다면 그건 공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현재의 선행 교육과 암기식 교육 따위로는 세계화 속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보름 남짓 뒤면 결정될 다음 대통령은 교육제도 개혁에 국가적 명운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이 육아 문제와 인구 절벽도 극복할 근본적 방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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