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판사의 침묵

    입력 : 2017.04.21 03:10

    조백건 사회부 기자
    조백건 사회부 기자
    이모(39) 판사가 법원행정처 고위층의 부당한 지시를 듣지 않아 행정처 입성 11일 만에 발령이 취소되는 '인사(人事) 보복'을 당했다는 의혹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가 18일 나왔다. A4용지 54쪽에 이르는 조사 보고서를 모두 읽어보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남았다. 보고서 어디에도 이 판사가 왜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일부 언론은 지난달 6일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이 법관 연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3월 개최하기로 한 세미나 축소를 지시했는데 이 판사가 거부하자 그를 원래 근무하던 안양지원으로 돌려보냈다고 보도했다. 이 판사는 이틀 뒤인 8일 법원 게시판에 '제가 경험한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 말씀드리는 게 옳은지 고심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이 발언은 이 판사가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의 인사를 둘러싼 의혹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이후 임종헌 전 차장은 전도유망한 젊은 판사를 행정처에서 내쫓은 '부당 지시의 장본인'으로 지목됐다. 임 전 차장은 "결코 부당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국 그는 지난달 19일 "동료 법관들의 나에 대한 신뢰를 자신할 수 없게 돼 버린 지금은 법원을 떠나야만 하는 때"라며 자진 사임했다.

    법원행정처가 있는 서초동 대법원. /조선일보 DB
    그러나 진상 조사 결과 임 전 차장은 이 판사에게 어떤 지시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판사도 진상조사위 조사에서 "임 전 차장으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이 판사는 임 전 차장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주범'으로 낙인 찍혀 직무에서 배제되고 결국 법원을 떠날 때까지 침묵하다가 한 달 후에야 자신의 입장을 비공개 조사에서 밝힌 것이다. 진상 조사에서는 임 전 차장이 아닌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이규진 상임위원이 이 판사에게 '부당 지시'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행정처로 발령받은 이 판사는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세미나 개최를 언론에 알리지 말고, 연구회 측 주장을 반박할 논리를 만들어 보고하라는 지시 등을 받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조사위에서 진술했다.

    이 판사가 받은 지시가 행정처 실무를 총괄하는 임 전 차장의 의중에 따른 것이라는 의심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이번 논란이 행정처의 권위적 조직 문화를 바꿀 계기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3000명 판사 사회와 법원이 이번 의혹에 휩쓸리며 치러야 했던 대가도 컸다. 이번 논란은 법원 안팎에선 올 9월 대법원장 교체기를 앞두고 법원 내 진보·보수 세력이 벌이는 힘겨루기라는 의혹, 행정처가 전체 판사들의 동향을 뒷조사한 문건을 갖고 있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소문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법원을 떠받치는 기둥인 국민의 신뢰를 판사들 스스로 깎아내렸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판사가 침묵한 지난 한 달여 사이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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