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베트남서의 21세기 筆談

입력 2017.04.19 03:04 | 수정 2017.04.19 10:42

노승영 번역가·격월간 '악스트' 편집위원
노승영 번역가·격월간 '악스트' 편집위원
그의 이름은 '띵'이었다. 정유년 정초부터 일주일 동안 베트남 호이안과 다낭을 관광하는 일정 내내 렌터카를 운전할 현지인 기사. 이왕이면 가이드 역할도 해주었으면 하고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노."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의 영어 실력은 나의 베트남어 실력과 맞먹었다. 렌털 비용이 유난히 저렴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나.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가다 마침내 떠오른 것은 '구글 번역'이었다. 얼마 전에 기계 번역 수준이 부쩍 향상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나는 스마트폰에서 구글 번역 앱을 열었다. 마이크 표시를 누르고 영어로 말을 하자 앱이 음성을 인식하여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띵에게 보여주었더니, 그가 알아들었다! 조선의 실학자 이수광과 안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이 필담을 나눈 지 400년 만에 한국인 관광객과 베트남인 기사가 나눈 21세기식 필담이었다.

띵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한 뒤에는 문자메시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는 영어를 베트남어로 번역하여 문자를 보냈고 그가 베트남어로 답장을 보내면 영어로 번역했다. 우리가 주고받은 메시지가 아직도 내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데, 전부 베트남어다. 누가 보면 내가 베트남어에 능통한 줄 알 것이다.

/베트남 택시기사와의 문자메시지 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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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번역은 복잡한 문장도 척척 번역해냈다. 이를테면 일단 숙소에 가서 애들을 내려다놓고 우리를 호이안 구시가지에 태워준 뒤에 나중에 데리러 오라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요구 사항도 띵은 제대로 알아듣고 이행했다. 투본 강 선상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구글 번역 덕분이었다.

그런데 띵과 나의 대화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알고 그것을 상대방이 안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 것. 이 믿음이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어로 번역된) 나의 말이 내가 의도한 의미를 전달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소외되었다. 다낭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베트남에 다시 오게 된다면 베트남어를 몇 마디 배워두겠노라'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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