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도시의 凶年

    입력 : 2017.04.19 03:08

    이충일 도시·교통 전문기자
    이충일 도시·교통 전문기자
    6년 전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도시의 흉년'이라는 장편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졸부(猝富) 가족의 속물적 삶을 다뤘다. 물질적 탐욕, 도덕적 타락, 일류병, 남아 선호, 정략결혼과 같은 그 시절의 병폐를 한 가정의 흥망사로 압축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서평에서 "박완서에게 '도시'란 욕망과 허위의식, 반(反)생명성이 지배하는 '흉년'과 같은 불모의 공간을 의미한 것"이라고 했다.

    그 시절 중·고등학생이던 나는 월간지 '문학사상'에 연재 중이던 이 소설을 우연히 본 뒤 헌책방들을 뒤져 과월호(過月號)까지 모아 읽었다. 하지만 스토리와 문체에 끌렸을 뿐 이런 분석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최근 다시 읽은 '도시의 흉년'은 상당히 달랐다. 호감을 느끼며 응원했던 주인공 여대생도 이제 보니 그 시절의 전형적 속물에 불과했다.

    나는 서울 종로구 교남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부근이다. 조그만 한옥인 생가(生家)는 오래전에 다세대주택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다시 그마저 헐리고 '돈의문 뉴타운'으로 변신해 최근 입주가 시작됐다. 돈의문은 서대문의 애초 이름이다. 어릴 때 뛰놀던 마을 위에 찍어누르듯 올라선 성채(城砦) 같은 아파트들은, 수년 전 완공된 동대문 밖의 또 다른 성채 '왕십리 뉴타운'보다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박완서가 소녀·처녀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도 아현동·영천동과 교남동 일대이다. 그의 소설과 산문 곳곳에 사라진 옛동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구절이 나온다. 70년대 정릉 달동네와 돈암동 부잣집, 그리고 명동 풍경의 묘사도 정치(精緻)하다.

    사업성 있던 뉴타운도 올스톱-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에 줄지어 있는 폐가들 앞을 한 남자가 걸어 올라가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시내 뉴타운 지역 내에는 폐가 약 5000여채가 방치돼 있다. /주완중 기자
    굳이 도시가 아니어도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또 굳이 어린 시절 공간이 아니어도 사라진 것은 아쉽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위안은 '어떻게 바뀌었는가'일 수밖에 없다. 박완서에게 70년대 도시의 삶은 탐욕과 타락과 허위에 빠진 채 부(富)를 찬양하고 빈(貧)을 조롱하던, 구제하기 힘든 긴 흉년 같은 것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기근(飢饉)을 딛고 내실을 다져왔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박완서도 별세 전까지 비슷한 생각 아니었을까 싶다.

    그동안 수많은 구획정리와 도시개발,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 외관이 크게 변하고 많이 정돈된 것은 사실이다. 어제도 전철을 타고 동호대교를 건너며 본 한강과 고층 건물들은 비 갠 후의 석양을 반사하며 찬란해 뿌듯했다. 하지만 변두리건 도심이건 한 걸음만 골목으로 들어가도 이 변모 대열에서 일시 탈락한 숱한 동네가 박탈감과 초조함에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다. 서울만 수백 곳에 이른다. 중장기 도시기본계획이 시장(市長) 취향대로 오락가락하면서 누더기 상태로 표류해온 탓도 크다. 민선 체제 도입 이후 오히려 악화된 느낌이다. 해운대 경관을 완전히 망친 부산 엘시티 사건에서 보듯, 개발업자의 돈질과 정치인·관료의 장난질도 여전하다.

    박완서는 '도시의 흉년'에서 정신적·물질적 몰락 이후의 재건 임무를 아들·딸·며느리에게 맡기고 소설을 끝낸다. 그 뒤, 그들이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따져보니 바로 그 아들·딸·며느리가 지금 중장년에 들어온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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