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셩쉥님" 영어 조기교육에 혀 꼬인 아이들

    입력 : 2017.04.12 03:07

    [영어 배우려다 우리말 못해 스피치 학원 찾아 발음 교정]

    '나 먹었어 밥을' 'time 몇시야'
    영어식 어순에 英단어 섞어쓰고 pink는 알아도 분홍은 모르기도

    대치동·목동에 전문학원 10여곳 '가갸거겨'부터 한글 새로 배워

    "엄마, 나 먹었어. 밥을"

    서울 서초구에 사는 주부 임모(36)씨는 최근 초등학교 1학년 아들과 대화하다가 깜짝 놀랐다. "학교에서 밥 먹었니"라고 묻자 아들이 영어식 어순으로 대답했기 때문이다.

    임씨의 아들은 다섯 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다녔고, 집에서도 되도록 영어를 쓰도록 교육받았다. 임씨는 "아들이 평소에 '지금 time(시간) 몇 시야'처럼 영어 단어를 섞어서 말해도 '영어 잘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우리말 어순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당황스러웠다"며 "이러다 우리말 못한다고 놀림당할까 봐 부랴부랴 키즈(어린이) 스피치 학원에 등록했다"고 말했다.

    최근 '키즈 스피치 학원'을 찾는 초등학생이 많아지고 있다. 서울 대치동이나 목동 일대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문 스피치 학원만 10여 곳이 생겼고, 일대일 개인 과외나 그룹 과외도 성행하고 있다. 과거 웅변 학원이 유행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학원을 찾는 목적이 달라졌다. 웅변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우리말 발음이나 어순을 교정하려고 학원을 찾는 초등학생이 늘어난 것이다. 영어 유치원과 해외 연수 등 어릴 때부터 영어를 자주 쓰는 환경에 노출되면서 정작 우리말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주말이었던 지난 9일 오후 1시쯤 서울 반포동의 한 스피치 학원에서는 "가나다라마바사…" "가갸거겨고교…" 같은 발음 연습이 한창이었다. 강사 임송하(29)씨가 학생 두 명을 앉혀놓고 한글 자모음 발음표를 읽고 있었다.

    이날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한글을 처음 배우는 유아가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었다. 김민호(가명·7)군은 "ㄹ(리을) 발음이 제일 어렵다"며 "'라면' 같은 단어를 말할 때는 친구들이 '미국 사람 같다'고 놀린다"고 했다. 다섯 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다니면서 조기 영어 교육을 받은 김군은 '라면'을 '롸면'이라고 발음한다.

    영어 조기 교육받은 어린이들이 잘못 사용하는 우리말
    학원을 찾는 초등학생 상당수는 'ㄹ'을 영어식 'r'이나 'n'으로 발음하고, 'ㅅ(시옷)'을 'sh' 발음과 혼동한다고 한다. 서울 대치동의 한 스피치 학원 대표는 "'선생님 수업해요'라고 할 때도 'sh'발음을 한껏 섞어서 '셩쉥님 슈업해요'라고 한다"며 "우습게 들릴 수 있지만 학원을 찾는 아이들 대부분에게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영어 유치원을 막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 때문에 교사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 김모(28)씨는 "한 반에 절반 이상이 영어 유치원 졸업자인데 그중 3~4명은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수업을 못 따라간다"며 "아이들이 'pink(핑크)'는 알지만 '분홍색'은 모르고, 좋아하는 곤충을 물으면 'ladybug(무당벌레)'라고 영어로 대답하면서 우리말로 '무당벌레'가 뭔지 모른다"고 했다.

    김씨는 "자기 생각을 말해보라고 하면, 외국인처럼 'Um…(음)'거리면서 말을 더듬는 학생도 많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키우는 주부 장모(36)씨는 "지난달 학부모 총회에 가니까 우리 아이가 '오마이갓(oh, my god·이럴 수가)' 같은 영어 감탄사를 자주 쓰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까지 물들었다고 핀잔을 들었다"며 "스피치 과외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김순환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모국어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영·유아 시기에 외국어를 과도하게 교육하면 아이가 혼란스러워 둘 다 제대로 하기 어렵다"며 "모국어 어휘나 문장 구조에 익숙해야 나중에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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