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범 잡은 '1호선 40대女' 알고 보니 30대 남자…신입 기관사와 男승객들의 합작

    입력 : 2017.04.10 16:05 | 수정 : 2017.04.11 18:12

    “기사에 ‘40대 여성’으로 나와 있기에 동료와 우스갯소리로 제가 작고 마른 체형에 머리가 길어서 아줌마로 보였나 보다 생각했는데, 제 동료가 그걸 진짜로 제보했네요!”

    지난 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에서 20대 여성을 따라다니며 성추행한 혐의로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현장에 있었던 한 승객은 “40대 여성이 성추행범을 붙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는데, 확인해보니 그의 정체는 30대 남성이었다. 그와 함께 코레일 신입 기관사도 성추행 용의자를 잡는 데 힘을 보탰다.

    /연합뉴스

    서울 금천구에서 근무하는 전모(36)씨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오후 7시쯤 퇴근해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 6-4번 칸에서 광운대행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승객들로 꽉 찬 상태였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지날 때쯤 갑자기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이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듣느라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울음소리가 다 들릴 정도라 깜짝 놀랐어요. 이어폰을 빼고 ‘무슨 일이세요?’ 물으니 ‘성추행당했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전씨가 타고 있던 칸에는 김우석(27) 구로승무사업소 기관사도 타고 있었다. 김 기관사는 서울역에서 금천구청역까지 열차 운행을 마친 뒤 기관사 복장으로 퇴근 중이었다.
    김우석(27) 기관사. 지난해 7월 정식 발령된 김 기관사는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성추행범을 재빠르게 잡고 전대식씨와 함께 상황을 수습했다. /김우석 기관사 제공
    “어디서 울음소리가 나기에 사람들에게 ‘코레일 직원이니 잠시만 비켜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어요. 여성분께 무슨 일이냐 물으니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셨어요.”

    이 여성과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여성은 등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신체를 만지는 것을 느꼈지만 당황해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금천구청역을 지날 때쯤 이 모습을 본 한 승객이 이 여성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해 자리를 이동했지만, A씨가 뒤따라와 여성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문질렀다고 한다.

    피해 여성에게 지목당한 A씨는 “난 성추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내가 만약 성추행을 했다면 내가 감옥을 가든 뭘 하든 다 하겠다”며 쇠고랑 차는 시늉을 해보였다.

    김 기관사는 A씨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을 붙잡고 승객들에게 “역무원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 모습을 본 피해 여성 맞은편에 앉아 있던 20대 남성이 경찰에 신고했다. 이때 A씨가 경찰에 신고한 남성을 향해 “야 이 XX놈아, 넌 그렇게 할 짓이 없냐? 왜 신고해?”라며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신고 남성에게 발길질하는 등 퇴근길 지하철이 아수라장이 됐다.

    다음 역인 구로역 출입문이 열리자 전씨는 A씨의 목을 잡고 뒤에서 끌어안았고, 김 기관사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아 플랫폼까지 끌고 나왔다. 이때 경찰에 신고한 남성도 따라 내렸다.

    플랫폼에서도 A씨의 몸부림이 심하자, 전씨는 그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발을 걸어 바닥에 눕혔다. 그러자 A씨가 누워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스스로 머리를 땅에 부딪히더니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머리야”하며 머리를 감싸쥐고 아픈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지난 5일 지하철 1호선에서 20대 여성의 신체를 만지며 성추행한 남성. 김우석 기관사의 요청으로 한 승객이 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독자제공
    김 기관사는 “저는 코레일 직원 신분이어서 승객인 A씨의 신체를 제 마음대로 만질 수 없었다”며 “전씨가 A씨를 막는 동안 저는 플랫폼에 있던 30여명의 승객 분들께 ‘여러분, 이분 혼자 머리 부딪히는 거 다 보셨죠?’라고 물으니 다 같이 ‘네’하고 호응해주셨다”고 말했다. 김 기관사는 시민들에게 증거로 남길 동영상을 찍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전씨는 경찰이 올 때까지 A씨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를 꽉 붙들고 있었다. 5분쯤 지나자 구로역 승무원과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했고, 결국 이들의 도움으로 이 40대 남성은 강제추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전씨는 진술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광운대역 방향으로 가는 1호선 열차에 올랐다. 전씨와 김 기관사의 인연은 이 열차에서 다시 이어졌다. 오후 7시 40분쯤 이들은 열차 안에서 또 마주쳤다.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 이들은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A씨가 전씨를 폭행죄로 고소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에 김 기관사가 전씨의 무고함을 증언해주기로 하면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 소동이 당일 밤 조선닷컴에 보도된 소식도 김 기관사가 전씨에게 전해줬다. “제가 기사에 여성으로 적혀 있는 것 같으니 확인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김 기관사는 “나는 코레일 직원이기 때문에 승객들 간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전씨는 정말 용감하게 나서줬다”며 “요즘은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할 때 남자 승객들이 주변에서 나서는 것을 꺼리는데 전씨와 경찰에 신고해주시고 목격자 증언까지 해주신 분 모두 남성이어서 놀랍고 뿌듯했다”고 말했다. 김 기관사는 지난해 7월 발령받은 신입 기관사다. 그는 “신입 직원의 패기로 더 용감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여성의 울음소리에 가장 먼저 나선 전씨는 “부모님이 ‘좋은 일에 잘 나섰다’고 자랑스러워 하시면서 ‘그런 성추행범은 두들겨 패주지 그랬냐’고 하셨다”고 전했다. 전씨는 “피해 사실에 대한 물적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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