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읽기] 김일성 경기장에 내걸린 태극기

  •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입력 : 2017.04.10 03:03

    北 주민에게 공포였던 태극기… 이젠 평양 하늘에 휘날려
    여자축구 평양 예선 때도 태극기 펼치고 애국가까지
    남북 영구분단 획책하며 金씨 왕국 보존하자 속셈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북한 주민들에게 '태극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필자도 북한에서 24년간 살면서 단 한 번도 태극기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태극기로 발생한 여러 사건은 간접 경험한 적이 있다.

    1977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을 때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의 고향은 평북 철산이었다. 그런 산골에서 요덕까지 끌려온 것은 태극기 사건 때문이다. 철산은 해안을 낀 산골 마을이어서 상륙부대 훈련지였다. 1970년 초 인민군 특수부대의 남침훈련을 철산에서 했는데 남한 군복을 입고 상륙하는 부대를 진짜 국군으로 오인한 일부 주민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한 사건이 발생했다. 놀란 김일성과 김정일은 태극기 소유자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1992년 탈북한 나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표부에 진입해 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다.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북한이 싫어 대한민국행을 결심했는데도 막상 태극기를 봤을 때 감정은 '공포심'이었다. 태극기는 세뇌당한 북한 주민에게 적대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집권 이후 남북관계가 활발해지자 북한은 정체불명의 한반도기를 만들어서 행사장에 나부끼게 했다. 남한 측도 정치적인 이유로 한반도기를 흔들도록 유도했다. 서로 정치적 대립을 피하자는 취지였지만 북으로선 태극기가 가진 흡인력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류는 북한에 유입되면서 남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태극기를 보게 되는 북한 주민이 늘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200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북한을 방문해 '동평양 대극장'에서 성조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걸고 미국 국가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압박을 무마하기 위해 김정일이 벌인 '쇼'이지만 참석했던 평양 상류층엔 엄청난 충격이었다. 2013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역도대회에서 국제 관례상 애국가와 태극기가 처음으로 평양에 소개됐다. 그때 북한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평가했지만 실은 그때부터 김정은 정권은 이미 새로운 남북관계와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것은 남북 영구분단 전략이고 그것의 실행이 시작된 것이다. 남한의 실체를 인정해 각자 살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주민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지난 5일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AFC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 때도 평양 군중 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국가가 연주되고 대형 태극기가 펄럭였다.

    북한 축구의 성지 김일성 경기장에 사상 처음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5일 열린 여자 아시안컵 예선 인도와의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의 이런 '관용'은 한국의 차기 정부와 남북관계를 개선해 새로운 돌파구를 열겠다는 제스처로 보기도 하지만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 지난 2014년 9월 인천 아시아게임 때 북한은 대규모 미녀응원단을 준비하다가 남측에 트집을 걸어 전격 취소한 적이 있었다. 고위 탈북자는 그때 미녀응원단 취소가 응원단 모집에 과열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김원홍 당시 보위부 부장이 이 사실을 김정은에게 보고했고 김정은은 "청년들이 남조선 말 쓰는 것을 유식한 것으로 착각한다"며 질책했다고 한다. 평양 중심부에서조차 북한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이 남한에 품은 환상은 상상외로 컸던 것이다.

    요즘 북한에선 전쟁하자고 떠들면 보위부의 감시 대상이 된다. 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무력통일 의지가 시들해진 자리를 채운 한류가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의 꿈을 새로이 품게 한다. 지금 김정은 왕조 집단은 겉으로는 남침 무력통일을 부르짖지만 본심은 영구적 정권 유지로 바뀌고 있다. 김정은의 잇단 실책과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봉쇄로 북한 내부는 전례 없는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다. 국가보위성 숙청까지 맞물리며 체제 유지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태극기를 본 북한 주민들이 영구분단의 절망에 빠질지 아니면 남북통일의 새로운 꿈을 품을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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