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미친 교육 싫어서 '미친 엄마'가 됐다

조선일보
입력 2017.04.08 03:01 | 수정 2017.04.08 05:19

[송혜진 기자의 느낌] 아들과 세계를 누빈 여행작가 오소희, 대한민국 육아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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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세 돌 직후 터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아기 중빈은 엄마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이제 키가 훤칠하게 자란 중빈은 가뿐하게 엄마를 등에 업고는 힐끗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 이젠 내가 잘 커서 고맙지?” 엄마 오소희는 그런 아들 등에 고개를 대고 슬며시 미소 짓는다. 지난 13년 동안 엄마와 아이는 그렇게 함께 훌쩍 자랐다. 그 시간도 문득 돌아보니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간이었다. /이태경 기자

아들 중빈은 세 돌을 갓 넘긴 아기였다. 다들 “저 어린 것을 데리고 어딜 가겠다는 거냐”고 했다. 서른세 살이었던 엄마 오소희는 그러나 멀리 떠나고 싶었다. 떠나야만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잘못 삼킨 사과 조각처럼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을 때였다. 일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나를 다시 바라볼 시간이 간절했다. 아이 엄마라는 핑계, 아이가 아직 어리니 힘들 거라는 충고 같은 건 잊어버리고 싶었다.” 오소희는 그렇게 아이의 고사리손을 끌고 덜컥 터키행 비행기에 올랐다. 톱카프 궁전과 하렘, 카파도키아 같은 관광지를 거쳐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된 여행은 어느덧 빈민가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현지 사람들과 섞여 지내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아이는 거리의 아이들과 축구를 했고, 때론 현지 사람들 품에서 낮잠을 잤다. 말랑했던 아기의 볼도 터키 바람과 부대끼면서 어느덧 한결 탄탄해져 있었다.


엄마와 아들의 방랑벽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오소희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사막을 갔고 정글로 떠났다. 아프리카로, 중남미로, 동남아로, 아랍으로 향했다. 어린아이와 함께 한 여행이었지만 언제나 가장 싼 숙소에 머물며 길거리 음식을 먹었다. 더 많은 현지인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엄마를 넘어 여자인 자신을 다시 찾고 싶었다던 오소희(46)는 그 사이 아이와 함께 한 여행의 기록을 엮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등을 펴내며 베스트셀러 여행작가가 됐고, 아들 중빈(16)은 학원을 기웃대지 않고도 스스로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소년으로 자라났다.


작년 1월, 오소희는 중빈을 키운 시간을 새삼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의 블로그에 어떤 엄마가 늦은 밤 “아이를 사교육으로 괴롭히고 싶지도 않지만,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리는 현실에서 모른 척 지낼 수도 없어서 너무 괴롭다”고 토로해온 것이 시작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가 겪었던 갖가지 일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오소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답글을 쓰기 시작했다. “덴마크 육아, 프랑스 육아, 글쎄요. 대한민국 현실은 그 어떤 다른 나라 육아법이나 교육 전문가 이론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대한민국 교육 제도 아래에서 아이와 엄마가 건강하게 살아남는 법은, 대한민국 엄마들 가운데 그것을 치열하게 고민한 엄마만이 답할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블로그가 달아올랐다. 뜨거운 글들이 쏟아졌다. 어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서도 볼 수 없는 엄마들의 치열하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오소희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렇게 1년 가까이 들어주었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긴 답장으로 써서 올리는 ‘엄마 내공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 2월, 그 중 일부를 책(‘엄마 내공’·북하우스 刊)으로 펴냈다. 지난달 말 오소희를 인천 송도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엄마보다 더 키가 커버린 아들 중빈도 함께 나왔다. 오소희는 아들 중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와 참 오래 달려왔어요. 항상 벅차도록 즐겁고 행복했던 것만은 아녜요. 때론 피눈물 났고, 때론 상처투성이였죠.”

대한민국이란 철옹성

―아이와 세계를 누볐던 여행작가 오소희가 지금 아이를 키우는 게 사실은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건가요.

“여행을 아무리 다닌다 한들, 결국은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발 붙이고 살아야 하니까요(웃음). 제아무리 건강한 교육관을 가졌다 해도 아이가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결국은 다 흔들리게 되는 게 대한민국 부모의 숙명이에요. ‘누가 뭐라고 해도 괜찮다. 나와 내 아이는 행복하다’, 백 번을 되뇌면 번뇌가 사라질까요. 주위에선 다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걸요. 이 말도 안 되는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그 속에서 저 역시 매일같이 피 흘리며 고민했어요. 어떻게 키워야 이 레이스에서 아이를 내 도움 없이 혼자 달리게 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키워야 내가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저 역시 시행착오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고, 그 속에서 아이와 남몰래 눈물 삼킨 게 또 한두 번이 아니었죠(웃음).”

―언제 어떤 눈물을 흘렸을까요.

“너무 많죠. 우리 아이는 발도로프 대안학교를 다니다가 스스로 ‘엄마, 이젠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어요’라며 자진해서 시험을 보고 국제학교로 옮겨온 경우거든요. 대안학교의 공동체 생활을 남편이나 저 모두 만족스러워 했던 터라, 처음엔 아이의 선언에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아이는 대안학교가 마음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으면 다른 아이들 공부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고도 말했어요. 그렇다면 대안학교를 나와 어디로 갈 것인가? 아이가 선택한 것은 국제학교였어요. 너무 놀기만 하지도, 공부만 하지도 않는 ‘가운데 학교’라는 것이 나름의 이유였지요. 그렇게 공동체 육아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막상 밖에 나와보니 그제서야 알겠더라고요. ‘아, 여긴 경쟁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곳이구나. 신뢰가 없는 곳이구나’를요. 중빈이는 대안학교에서 숙제나 시험에 대한 압박 없이 즐겁게 공부해 온 덕분에 항상 생기가 넘치고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아이였거든요. 그만큼 수업 시간에 질문도 많았고요. 그런 중빈이가 학교를 옮기고 들은 첫 마디가 ‘너는 왜 이렇게 나대냐?’였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오소희는 애초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면 뭐하나’라고 생각했던 때가 그에게도 있었다고 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서소문에 있는 광고회사에 다녔던 그다.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벽같이 출근했다가 늦은 밤 퇴근하는 날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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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어린 아들 중빈과 세계 여행을 다니던 오소희의 모습, ②콜롬비아 바리차라 거리에서 개를 쓰다듬고 있는 중빈, ③인도네시아 발리 페르마타 하티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공연을 마친 중빈(오른쪽). /북하우스·오소희 제공

그렇게 스물다섯 살 무렵인가, 점심을 먹으러 잠시 나왔을 때 회사 앞 벚나무에 꽃망울이 맺힌 것을 보았다. 잊고 있던 풍경이었다. 오소희는 “그때 ‘꽃도 제대로 못 보면서 회사를 왜 다닐까, 언제까지 정해진 궤도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미루며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사표를 냈고, 8년을 연애한 남자와 결혼했다. 충남 계룡시에서 학사장교로 근무하게 된 남편을 따라 계룡산 자락 근처에서 3년을 살았다. 백수로서 보낸 시골 생활은 벅차게 행복했다. 꽃이 피면 눈이 시리도록 꽃을 보러 다녔고, 낙엽이 쌓이면 무릎이 젖을 때까지 낙엽을 밟고 다녔다. 책이 읽고 싶으면 며칠이고 잠도 자지 않고 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나니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여자인 내가, 생명체로서의 내가 보이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싶다. 낳아서 친구처럼 같이 끼고 비비며 자라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에야 들었어요.” 그렇게 중빈을 낳았고, 서울로 옮겨왔다. 삶의 또 다른 진통이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떤 진통입니까.

“내 아이를 내 맘대로 내 철학대로 편하게 키울 수 없는 진통요(웃음). 정말이지 사방에서 ‘학습지는 왜 안 시키냐’ ‘영어 유치원은 왜 안 보내냐’ 하는 거예요(웃음). 그때 진심으로 궁금해졌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사나?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서 어린아이를 데리고도 여행을 떠났던 겁니다. 그때부터 ‘미친 엄마’ 소리를 들을 작정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저는 아이가 무언가를 주입받기 전에 먼저 세상을 자유로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아이가 넓은 세상에서 편하게 소통하는 법은 가르쳐주고 싶었고요. 학원을 보낼 생각은 없었고, 그래서 돌 이후부터 1년 내내 아이와 영어로만 대화했어요. 다들 ‘아이 바보 만들려고 그런다’고 손가락질했는데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죠. 중빈이는 그 덕에 영어와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하게 됐고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수많은 어른에게 사랑을 받았죠. 이후로도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사교육은 시키지 않았고요.”

‘엄마 내공’에서 오소희는 그러나 “막상 중빈이가 중학생이 된 이후에도 그 어떤 사교육도 안 시켰던 것은 너무 뭘 몰랐던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오소희는 “대안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다른 길에 접어들었을 때는 분명 엄청난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고 했다.

―사교육을 절대 안 시키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우리나라 현실에선 오만이라는 건가요?

“제 경우에는 그랬죠(웃음). 아이보다 앞서 달리면서 채찍질하는 사교육에는 여전히 반대하지만, 아이가 ‘이건 필요하다’고 본인의 의지로 손 내밀 때는 맞춰줄 줄도 알아야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다른 나라의 상황을 정확히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진정한 균형을 찾는 것이 저로선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숙제였죠.”

중빈이는 요즘은 수학 학원에 다닌다. 중빈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선행학습을 해본 적 없고, 처음엔 다들 함수 풀고 있을 때 나는 분수 정도를 풀고 있었지만 이젠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젊은 엄마가 변하지 않으면

오소희의 블로그엔 요즘도 매일같이 고민의 글이 날아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들리는 고민 상담은 소위 ‘독박 육아’에 대한 것이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오소희는 “독박 육아라는 말이 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지 않으냐”고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들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까요(웃음). 독박 육아가 횡행하는 나라는요, 곧 망할 나라예요. 어떻게 아이를 엄마 혼자 키우라고 내버려둘 수가 있을까요. 나라가 도와주고 공동체가 도와줘도 모자라는데,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하죠. 그렇게 외롭고 지쳐서 아이를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조금만 지나면 경쟁으로 뛰어들라고 하죠. 독방에 가둬놓고 있다가 먹이 하나만 놓고 서로 먹도록 싸우라고 붙여놓는 꼴이에요.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양 아닐까요? 이런 끔찍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뭐죠.

“연대(連帶)요. 이 땅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엄마로 살아가면서 상처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흉터를 서로 보여주면서 터널을 통과하다 보면, 어쩌면 우리는 이 지옥의 시간을 통달해버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미 아이가 고학년이 돼버린 엄마들 앞에서 이렇게 ‘연대’ 얘기를 꺼내면 다들 ‘연세대 얘기하는 거냐’고 물어요(웃음). 안타깝지만 교육판에 이미 뛰어들어서 경쟁을 시작한 엄마들에겐 이런 얘기가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고민은 정말로 꼭 반드시 젊은 엄마들이, 아이가 어린 엄마들이 해야만 해요.”

―젊은 엄마가 변해야 한다?

“그렇죠. 내 정보만 먼저 챙기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세상, 내 아이만 잘되고 남의 아이는 뒤처지길 바라는 세상. 우리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아이가 어릴수록 주변 엄마들과 적극적으로 손 잡는 법을 배워야 해요. 우리 탐색 얼마나 많이 합니까(웃음). 아침부터 밤까지 스마트폰 들고 검색하잖아요? 그 전화기 들고 누르면서 반응만 하지 말고, 그 좋은 도구를 들고 이젠 탐색을 해야 하고, 모색을 해야 해요. 나와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찾아나서야 하고요, 그 사람과 마음을 나눠야 해요. 그렇게 동료를 찾아내면 이 경쟁 사회에서 그래도 더 단단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버틸 수가 있어요.”

오소희는 강연을 자주 다닌다. 강연을 나가면 상처받은 엄마, 자존감을 잃고 넘어진 엄마들을 많이 만난다고 했다.

―어떤 상처입니까.

“외로워서 생긴 상처이고요, 두려워서 생긴 상처죠. 그 근원엔 경쟁이 있고요.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대로, 헤매는 사람은 헤매는 사람대로, 지금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무섭고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남과 나누지 못하는 거고요. 그분들에게 종종 묻곤 해요. ‘그렇게 달려서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세요?’라고요. 다들 대답을 잘 못하죠. 트랙을 돌 때는 안 보이는 거예요. 내가 왜 달리는지. 멈추면 보이지만요.”

'남다르게'를 넘어 '남을 위해'


아들 중빈은 4년 전부터 인도네시아 발리 우붓에 있는 ‘페르마타 하티’라는 고아원을 오가며 그곳 아이들에게 노래와 악기 연주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고아원 아이들은 처음엔 ‘도레미’ 같은 음계조차 읽을 줄 몰랐지만, 금세 스펀지처럼 중빈이 들려주는 노래와 리듬을 흡수했다고 했다. 아이들은 4년 만에 이제 어엿한 밴드를 구성해 발리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중빈은 “이제 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며 머쓱해했다. 아이들에게 더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중빈은 작년 10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볼룬트래블링(Voluntravelling)’을 함께 할 분을 찾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뜻(Volunteering while travelling)을 담아 제가 만든 단어예요. 한글, 수학, 시 쓰는 법, 노래, 춤, 어떤 것을 가르치고 나눠주셔도 좋습니다.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중빈은 이 글을 쓴 직후 수백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50여 명의 여행객들이 이 재능기부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고아원 아이들의 대학교육까지 지원하는 장학기금도 마련됐다.

―중빈군이 스스로 봉사활동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조직할 정도의 능력이 되는 거군요.

“그런가요(웃음)? 흔히들 ‘남다른 교육’을 추구하지만, 저는 ‘남을 위하는 교육’에 대해서 더 알려주고 싶었고요. 그게 성공했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중빈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군가 행복하면 결국 반대편의 누군가는 불행하다는 걸 일찍 깨치게 된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하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행복했던 것 같다”면서 웃었다.

―결국 그렇게 아이와 여행을 하면서 가르치고 싶었던 것도 다같이 행복해지는 법에 대한 것인가요.

“맞아요. 여행에는 네 단계가 있어요. 거울을 보듯 내 모습만 보고 다니는 것. 그다음엔 그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그 나라 사람과 사귀는 것. 마지막이 내 것을 나누어 그 곳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거든요. 저는 우리가 함께 마지막 네 번째를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해요.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 뭐가 있을까요. 돈이나 물건은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태도는 아이의 몸에 흐르는 무언가가 되어 대대로 남아요. 저는 바로 이 더불어 사는 삶의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어요.”

말을 마친 오소희는 지그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클지 기대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중빈이 얼굴을 살짝 물들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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