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able] 만화방 아들, 웹툰의 새 판 짜다

    입력 : 2017.04.05 03:03

    [Table with] 웹툰 마니아들의 '성지' '레진코믹스' 권정혁 부사장
    "초등학생 때 주 업무가 단골에 만화책 추천… 요즘 빅데이터'추천 서비스'원조
    유료 웹툰 서비스 '파격'… 대중성 없어도 장르 불문 작품성 좋은 만화 연재
    무언가에 푹 빠져본 사람은 특별하다… 내 딸이 오타쿠로 큰다면 대환영"

    만화를 책으로만 보던 시절, 한여름의 만화방은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만화책들로 곰팡이 그득 핀 습자지 냄새를 풍겼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연두색 인조가죽 소파 깊숙이 몸을 구겨 넣고 만화책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십 권 연작(連作) 시리즈를 탑처럼 쌓아놓고 한 권씩 정복해가는 그 맛. 이 '시간 도둑'은 2003년 '웹툰'이라는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종이 속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서 수많은 컷(cut)으로 흩어졌던 그림들은 이제 하나의 컷으로만 존재한다. 스마트폰을 쥔 독자는 엄지손가락을 튕겨 다음 컷, 그다음 컷으로 만화 속 세상을 항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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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방처럼 꾸며진 서울 역삼동 레진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 로비에 선 권정혁 부사장. 앞에 있는 흰색 강아지 캐릭터는 이 회사 마스코트 ‘돈독이’. 권 부사장은 “돈독한 관계, ‘돈독’ 오른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웹툰 마니아라면 거의 매일 출근하는 '만화방'이 있다. 2013년 레진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 '레진코믹스'란 웹툰 플랫폼이다. '웹툰 플랫폼'이란 손에 안 잡히는 인터넷 세상에 차린 '온라인 만화방' 같은 개념. 네이버·다음 등 포털이 만화를 무료로 공개하던 때, '레진'은 배포 좋게 유료 웹툰 서비스를 시작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성 높은 만화가 쏟아지면서 만화광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이 역발상 아이디어를 실현한 주역이 권정혁(44) 레진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이다. '웹툰 마니아의 수장(首長)'인 그는 젊은 세대에서 '덕업일치(오타쿠가 취미를 직업으로 이어 성공한 경우를 일컫는 속어)'의 표본으로 꼽히는 선망의 대상이다. "'만화방 아들'로 유년시절을 보내다 마흔줄에 결국 가업(家業)을 이어받았다"는 그를 역삼동 레진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났다.

    만화방 아들, 웹툰을 움직이다

    ―부모님의 만화방에서 뭘 배웠나.

    "1980년 부모님이 서울 자양동에 만화방을 차렸다. 초등학교 입학 때다. 요즘 거리 곳곳 들어차는 프랜차이즈 카페처럼 1980년대는 만화방 창업이 유행했다. 온종일 만화책을 읽었다. 순정·무협·액션·스포츠 등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내 주 업무는 단골손님에게 만화책 추천하기였다. 어른들이 와서 '요즘 뭐가 재밌니?'라고 물으면, 단골이 어떤 만화를 주로 빌려봤는지 기억해뒀다가 좋아할 법한 만화책을 추천했다. 지금 빅데이터로 제공하는 '추천 서비스'가 37년 전 '만화방 아들'의 일상에서 태어난 셈이다(웃음)."

    ―이력을 보면 처음엔 만화와 동떨어진 길을 걸었는데.

    "대학 졸업 후 20년 동안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차량 내비게이션 지도, 삼성 프린터, 콜센터 시스템도 만들고 모바일 클라우드·앱 서비스도 기획했다."

    ―왜 다시 만화인가.

    "한희성 대표가 트위터 DM(다이렉트 메시지) 한 통을 날렸다. 만나자마자 그가 물었다. '만화 좋아하세요?' 유명한 일본 만화 '슬램덩크'에서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농구 좋아하세요?' 물은 것처럼. 감히 만화방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가소롭다고 조소를 날리려던 찰나, 다음 질문이 훅 들어왔다. '지금도 만화 보세요?' 멍해졌다. 마지막 본 만화가 무엇이었나, 만화와 결별했던 시간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왜 만화를 보지 않았나?

    "볼만한 만화가 없었다. 달리 말하면 '내 취향의 만화'를 어디서 찾아봐야 할지 몰랐다. 한 대표가 구상한 웹툰 플랫폼 기획에 이 막막함을 풀어줄 실마리가 있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재밌는 만화를 편하게 볼 수 있는 환경 만들기. 만화로 풍성했던 내 어린 시절 삶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이전 회사에서 책상에 만화책 쌓아두고 읽던 개발자 몇몇을 꾀어 '레진'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2013년 4월이었다."

    ―개발자 관두고 만화로 돌아갔을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혹시 이현세 작가 만화도 연재하느냐'고 물으시더라. 부모 세대에서 가장 인기 작가였으니, 사업 성패가 이현세 작품 유무에 달렸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2014년 이현세 작가의 '굿바이 썬더'가 단독 연재될 때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이제 마음이 놓인다' 하셨다(웃음)."

    이상하고 아름다운 '오타쿠 나라'

    레진코믹스
    ―어떤 만화를 소개하는 게 목표인가.

    "2013년부터 '레진'에 작품을 연재 중이거나 연재를 끝낸 작가는 570명, 이 중 신인 작가는 387명에 달한다. 회사 출범 후 '작가가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리는 환경이 조성됐다. 대중성이 떨어지는 장르라도 작품만 좋으면 정식 계약을 맺었다. 만화만 좋으면 독자는 따라온다. 웹툰 '신의 속도'는 소재가 '펜싱'이다. 올림픽 때 반짝하고 대중 관심사에서 사라지는 종목이지만 어떤 독자에겐 취향에 딱 들어맞는 만화다. 장르 폭을 넓혀가면서 '어떤 만화든 레진에 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채용 조건 중 하나가 '오타쿠(특정 분야에 탐닉한 마니아를 일컫는 일본 단어)'인 게 특이하다.

    "하나에 미친 사람은 그 일을 할 때 제 역량이 최대치로 발휘된다. 사원 106명은 기본적으로 만화를 사랑하고, 저마다 무언가를 깊이 탐닉하는 오타쿠들이다. 가끔 회사 단톡방을 볼 때마다 '이 회사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웃음)."

    ― 왜 '오타쿠'를 신뢰하는가.

    "무언가에 푹 빠져본 사람은 특별하다. 미주사업총괄법인장은 심각한 '스타워즈' 오타쿠다. 어느 날 직원 한 명이 '미국에서 경영학 박사를 딴 친구가 취업은 안 하고 매일 만화만 본다'면서 채용을 추천했다. 면접 때 '만화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스타워즈와 얽힌 일화를 들려주더라. '스타워즈 에피소드7의 트레일러(예고편)가 극장에 공개됐을 때 온종일 상영관을 돌아다니면서 트레일러만 감상했다. 상영관 서너 개를 지날 때쯤 몇 놈이 나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 상영 회차가 끝나고 이들과 맥주를 마셨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번역가로 채용했다. 미국 만화와 한국 만화를 둘 다 좋아하는 친구라 '번역 품질'이 다르다. 미국 정서에 맞게 만화를 번역하다 보니 미주 사업이 활황이다. 콘텐츠를 사랑하는 사람, 남들이 '오타쿠'라 부르는 사람이 '레진'의 가장 큰 자산이다."

    딸,'마니아'로 키우기

    ―육아법이 궁금하다. 오타쿠의 딸은 오타쿠로 크나.

    "나는 한글을 만화로, 영어를 게임으로 배웠다. 어드벤처 게임을 하면서 전체 줄거리가 궁금해 영어를 독학했다. 무언가에 흠뻑 빠진다는 건 난제(難題)와 부딪혀본다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어렵다. 영어판 게임을 잘해보려고 영어를 독학했듯, 깊이 탐닉할수록 난관은 많아지고 성취감은 커진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이 건축 게임 '마인크래프트'에 푹 빠져 있다. 길가다가 본 건축물을 게임상에서 똑같이 만들거나, 퇴근하고 집에 가면 '아빠, 오늘은 도서관을 한번 지어봤어' 하면서 설계 원리를 한참 설명한다. 교과서로는 못 배울 '공간지각력'을 게임으로 키우는 것이다. 오타쿠로 큰다면 환영이다."

    ―대개 한국 학부모는 여전히 자녀가 '오타쿠'로 클까 두려워한다.

    "부모가 탐닉을 경계하라고 교육받아 온 세대라 그렇다. 푹 빠져본 경험이 없으니 두려울 수밖에. 자녀가 무언가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한 대상에서 이룰 만큼 이루면 관심 대상은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레진이 그리는 '미래'가 궁금하다.

    "전 국민의 '오타쿠'화. 스타워즈·마블 같은 작품이 미국에서만 나타나란 법 있나."

    권정혁 레진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은

    1973 서울 출생
    1993 한영외고 졸업
    1997 한성대학교 전산통계학과 졸업
    2007 카이스트 대학원 소프트웨어 전문가 과정 석사
    2007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2010 KTH 기술전략팀장
    2013 한희성 대표와 ‘레진코믹스’ 공동창업
    2016 ‘레진엔터테인먼트’ 매출 391억 돌파

    권정혁이 꼽은 ‘레진코믹스’ 색깔 보여주는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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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신기록(리율 작가): 한국화 화풍을 만화에 담아낸 작품. 완성도 높이려 ‘일주일 1번 연재’ 틀을 깨고 ‘한달 2번 연재’ 같은 차등 연재 기간 제도를 도입했다. 단지(단지 작가): 어린 시절 이유없이 학대당한 큰딸의 아픔을 그린 자전적 만화. 같은 상처를 품고 살아온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의 속도(IRE 작가): 정통 스포츠 만화의 문법을 따르는 국내 최초 ‘펜싱 만화’. 작품의 완성도는 소재의 특수성을 이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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