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대양서 파도 밀려오듯 '라자냐'의 묵직한 맛

  • 정동현 대중식당 애호가

    입력 : 2017.04.01 03:02

    [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을지로 '라 칸티나'

    구슬 같은 비가 내리는 저녁이었다. 차가운 바람에 퇴근길 직장인들은 굳은 표정으로 옷깃을 여미었다. 한·중·일어가 뒤섞인 을지로 입구 사거리를 지나 한 빌딩 지하로 발길을 옮겼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지하는 빈 배처럼 텅 비어 있었다.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로비 건너편으로 동화책에서 보던 저택의 웅장한 나무 문이 보였다. 문 뒤로 주황빛 아늑한 조명이 펼쳐졌다. 한 신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라 칸티나입니다."

    이미 전화로 들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1967년 개업해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려고 전화기를 든 것이 며칠 전이었다. 나는 식당 앞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줄을 서는 것이 싫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무조건 예약한다. 식당에서도 느닷없이 밀어닥치는 경우보다는 나을 것이란 계산도 있다. 자주 예약 전화를 하니 안내 목소리만 들어도 그 식당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클래식 FM을 틀어놓은 듯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바리톤풍 목소리는 남달랐다. 그 목소리 주인공을 따라 부드러운 현악기 음색이 흐르는 홀을 가로질렀다. 마치 와인 창고 같은 작은 방이 우리 자리였다. 두꺼운 메뉴판에는 영어와 한글이 병기된 서문이 있었다. 첫 문장은 '이태리 고대 풍습과 격조를 따르는 데 노력하였습니다'였다. 고고한 문체였다. 책장을 넘기는 사이 또 다른 초로 신사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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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현 제공
    첫 음식은 칼라마리 프리타(8800원)였다. '새끼 오징어 튀김에 탈탈 소스'라는 부제가 붙은 요리였다. 옛날 식으로 발음한 '탈탈 소스'의 정식 명칭은 타르타르(tartar) 소스로 마요네즈에 양파, 오이 피클, 파슬리, 레몬즙 따위를 넣어 만든다. 서양식으로 고운 빵가루를 입혀 튀긴 오징어를 이 소스에 듬뿍 묻혀 입안에 넣었다. 순간 혀에서 침이 쭉 나오고 머리 뒤쪽으로는 짜릿한 자극이 왔다. 타르타르 소스의 산미 덕분이었다. 이른바 본토 '구라파'에서 맛보던 과감한 신맛이었다. "네가 소스에 레몬즙 넣었니?"라고 한 친구가 물을 정도로 맛이 강렬했다. 곁들인 마늘빵(1200원)은 시중 것처럼 기름에 찌든 신문지 맛이 나는 종류가 아니었다. 고소하고 바삭하여 신선하다는 형용사가 어울렸다. '라 칸티나 특별 이태리 국수 요리'라는 설명이 붙은 스파게티 올드 패션드(1만7000원)는 토마토 소스와 쇠고기 닭고기를 넣고 치즈를 위에 올려 구운 요리였다. 그 맛이 친숙하고 정겨웠다. 봉골레 스파게티(1만8000원)는 여느 것과는 달리 국물이 넉넉했다. 진하게 우린 닭육수였다. 마늘을 써서 맛이 고소했고 질 좋은 올리브 오일 덕인지 뒷맛이 산뜻했다. 욕심을 내 버터, 우유와 밀가루로 만든 베샤멜(béchamel) 소스, 모차렐라 치즈, 리코타 치즈, 미트 소스를 번갈아 깔고 그 사이 라자냐 면을 넣고 오븐에 구운 라자냐 알 포르노(1만8000원·사진)도 시켰다. 대양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그 맛이 묵직하고 진했다. 재료를 아끼지 않은 탓이다. 감히 남길 수 없는 정직한 요리였다.

    무엇보다 그날 저녁을 잊지 못하게 한 것은 끊임없이 테이블을 찾고 미소를 잃지 않던 신사들이었다. 문을 나서는 우리 뒤로 고개 숙여 인사하던 모습, 그것은 먼저 스스로를 낮추고 손을 내미는 넉넉한 가슴이었다. 그리고 시간 속에 빛이 깊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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