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오전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하기 직전, 서울 삼성동 자택으로 막내동생 지만씨와 올케 서향희씨가 찾아왔다. 두 남매의 만남은 2014년 3월 이후 3년 만이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동생 부부가 둘째 아들을 얻자 외부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가는 길에 박 회장 집에 잠깐 들렀다.
박 전 대통령 취임이후 남매의 만남이 이렇게 뜸해진 이유는 박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형제들이 구설에 오르는 것을 극히 꺼려 동생들과의 만남 자체를 피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관계가 좋았던 지만씨 가족조차 청와대에 들인 적이 없었다. 부모의 기일에도 박 전 대통령은 홀로 참배를 다녀오곤 했다.
이날 박 전 대통령 자택에 지만씨 부부가 들어갔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갔던 지난 2013년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만남을 허락했다는 뜻이다. 이들은 이날 박 전 대통령의 삼성동 사저 2층 방에서 10여분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지만씨는 박 전 대통령 파면 선고 후 주변에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누나의 생활비라도 대며 돕고 싶다" "누나가 부르면 언제든지 가겠다"고 말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도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 뒷바라지를 하겠다'며 박 전 대통령을 위로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날 삼성동을 찾았던 친박 의원들은 "박 전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는 지만씨 부부의 눈시울이 붉었고, 박 전 대통령도 눈가가 젖어있었다"고 전했다. 지만씨 부부는 법원으로 떠나는 박 전 대통령을 배웅한 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부모님 묘를 참배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대통령 남매의 상봉 자리에 박 전 대통령의 여동생이자 지만씨의 누나인 근령씨는 이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근령씨도 박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언론 인터뷰 등에서 눈물을 흘리며 "억울하고 참담하다" "언니가 피를 많이 흘리고 순교했다"며 탄핵의 부당함을 주장, 박 전 대통령 편에 섰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에 이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격 당해 서거한 뒤, 고아가 된 삼남매가 도망치듯 청와대를 빠져나온 38년 전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됐다.
동생들의 이러한 행동들로 볼 때, 박 전 대통령의 파면과 검찰 수사를 계기로 삼남매가 다시 서로를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우선 박 전 대통령은 가족을 대신해 사생활을 오래 챙겨준 지인 최순실씨 등과는 탄핵 사태로 인해 인연이 끊어진 상태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경호·경비만을 받을 뿐이며, 변호인단이나 친박 의원들, 개인 비서가 돕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구속 결정이 내려지든 아니면 사택에서 장기 칩거에 들어가든, 미혼의 독신인 박 전 대통령으로선 가족의 도움이 필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동생들은 오랜 시간 불화와 갈등을 겪어왔다. 최고 권력자였던 부모를 차례로 흉탄에 잃은 경험처럼, 권력 때문에 빚어진 굴곡진 가족사였다. 삼남매 간 불화의 시작은 최순실씨의 아버지 최태민 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박 전 대통령이 의지했던 최씨는 박 전 대통령이 이사장을 맡은 육영재단 운영 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육영재단 분규로 근령·지만씨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최태민 목사의 손아귀에서 언니(누나)를 구해달라"고 탄원할 정도였다. 박 전 대통령은 근령씨에게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넘기고 동생들과는 접촉을 끊다시피 하며 칩거에 들어갔는데, 이 때부터 최의 부인 임선이씨나 딸 순실·순득 자매가 박 전 대통령의 실질적인 후견인 역할을 했다. 동생들을 멀리한 대신 최씨 집안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80년대부터 마약 투약 등으로 방황하던 남동생 지만씨가 2004년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모처럼 형제간의 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야당 당수로 대선 도전 채비를 갖추고 있던 중년의 박 전 대통령은 오랜만에 집안이 '정상화'되는 모습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으며, 동생 부부가 낳은 조카들을 매우 아꼈다. 첫 조카 세현군을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만씨도 안정된 가장이자 EG 회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박 전 대통령을 음으로 양으로 뒷받침했지만, 동시에 '남동생이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 아니냐'는 말을 낳기도 했다. 올케인 서씨가 박 전 대통령을 등에 업고 사건 수임 등에서 특혜를 입는다는 '만사올통'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여동생 근령씨에 대해선 근령씨가 연하의 정치 지망생 신동욱씨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사실상 연을 끊고 살았다. 박 전 대통령은 근령씨 부부가 자신을 정치적·금전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의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2007년께부터 신씨는 육영재단 소유권을 두고 지만씨 등과 다툼을 벌이다 '박근혜의 사주로 박지만이 나를 청부 살해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과 지만씨가 신씨를 고소해 2012년 신씨가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근혜·근령 자매의 인연도 완전히 끊어졌다. 근령씨 자신도 박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대통령 동생 신분을 이용한 억대의 사기 혐의 등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지만씨와도 내내 정치적으로도 불편한 관계였다. 이미 지만씨의 사업이나 서향희씨의 변호사 활동 등이 국정감사 때마다 야당의 공격소재가 되고 있었다. 지만씨를 둘러싼 대통령 측근 간의 권력 분쟁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이 지난 2014년 말 '십상시 문건' 사태다. 당시 지만씨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던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최순실씨의 전 남편이자 박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인 정윤회씨와 '문고리 3인방'의 행적 등을 조사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를 계기로 문건 제작자들이 경질 당했다. 대통령의 동생마저 물리칠 정도로 강한 문고리 3인방의 실체,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느냐는 의문도 이 때를 계기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지만씨는 "누나가 무섭다" "피보다 진한 물도 있더라"는 말을 했다고도 알려져있다.
지난해 친박 핵심들도 존재조차 몰랐다는 최순실씨와 그 가족들이 국정에 전방위 개입했다는 사실이 터져나오고, 이를 계기로 박 전 대통령은 탄핵과 파면, 그리고 검찰 수사까지 맞닥뜨리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이 형제들과 멀어지는데 쐐기 역할을 했던 최씨 집안과 결별할 수밖에 없게 된 지금, 박 전 대통령이 다시 동생들의 손을 잡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