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아파트 슬럼화'는 눈앞에 다가온 미래다. 재건축·리모델링 사업을 진행하지 못한 노후 아파트는 거래가 끊기고, 주민들이 속속 이탈하면서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불가피하다. 주민 대부분이 저소득층 노인들로 구성되면서 재건축 등 정비사업 추진 동력이 떨어지고, 슬럼화가 가속되는 것이다.
실제로 1971년부터 입주한 일본 도쿄 인근 다마 신도시는 1990년대 초까지 '꿈의 신도시'라 불렸지만, 아파트 노후화로 젊은이들에게 외면받으며 빈집이 늘어나는 등 슬럼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찬호 주택산업연구원 박사는 "우리나라도 2020년 이후 주택 가격 상승 동력이 떨어지면, 노후화된 1기 신도시 아파트를 중심으로 일본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 3분쯤 걸어가자 1974년 준공한 B아파트가 보였다. 870여 가구 규모의 지하철 초역세권 아파트. 하지만 아파트 앞 인도엔 공사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낙하 방지용 지붕이 설치돼 있었다. 입구에는 2001년 '재난위험시설(D등급)'을 받았다는 노란 표지판이 붙어있었고, 단지 안은 외벽이 반쯤 뜯겨나가고 공터엔 쓰레기가 언덕처럼 쌓였다. 창문이 깨진 채 방치된 빈집도 곳곳에 눈에 띄었고, 아파트 경비원은 "겨울이면 노숙인들이 억지로 문을 뜯고 들어가 살기도 한다"고 전했다.
◇서울·부산 아파트 3분의 1 재건축 대상
전국에서 30년 이상 노후 아파트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16만3553가구)과 부산(7만3976가구)이다. 현재는 전체 아파트의 10% 정도이지만, 8년 후인 2025년이면 서울은 약 58만 가구, 부산은 약 26만 가구로 늘어난다. 지역 전체 아파트의 3분의 1 이상이 30년 이상 노후 아파트로 채워지는 것이다.
정부는 2014년 9·1 대책을 통해 아파트 재건축 가능 연한을 준공 후 40년에서 30년으로 앞당겼다. 이 기준대로면 2025년엔 1기 신도시 5곳을 포함해 수도권에만 재건축 대상 아파트가 150만 가구를 넘을 전망이다. 그러나 모든 노후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실제로 B아파트는 시설 노후화로 2001년 재난위험시설로 지정됐지만, 조합 내 갈등과 시공사 계약 해지 등 십수 년째 재건축 사업이 표류하면서 단지가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이 아파트는 최근 SH(서울주택도시공사) 주도로 기업형 임대주택 '뉴스테이'로 재건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안전 E등급 아파트… 붕괴 위험
이미 슬럼화된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최소한의 주거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지은 지 48년 된 부산 A아파트에서 보증금 700만원에 월세 7만원을 내고 사는 이상태(72)씨는 "이 아파트가 지역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데도 구청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지어진 부산 남포동 '청풍장' 아파트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차동주(68)씨는 "아직 일본식 다다미방 형태인 집도 있고, 4층은 임의로 증축한 무허가 주택"이라며 "재건축을 하려고 해도 당장 갈 곳이 없는 주민들이 반대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23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C아파트 입구엔 안전진단 E등급을 받았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E등급은 '심각한 결함으로 위험이 있어 즉각 사용을 금지하고 보강·개축해야 하는 상태'다. 박영생(67) 입주자대표회장은 "아파트 주민의 80% 이상 동의서를 받았는데도 신길10구역으로 같이 묶인 단독주택 소유자들 반대로 재건축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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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A아파트. 지은 지 23년 된 이곳은 겉모습은 깔끔하지만, 노후화가 심각하다는 게 한결같은 주민들 하소연이다. 주민 김모(57)씨는 "수도관이 낡아 물에서 비릿한 걸레 냄새가 난다"면서 "주차 공간도 부족해 단지 밖에 불법주차를 했다가 딱지를 뗀 경우가 허다하다"고 전했다.
1992년 입주한 경기 안양시 평촌 B아파트는 녹물로 '악명'이 높다. 집마다 샤워기와 세탁기, 싱크대에 녹물 제거기를 설치해야 할 정도다. 유치원생 자녀가 있는 한 주부는 "녹물을 걸렀다 해도 밥을 해먹을 때마다 찜찜하다"고 말했다.
더구나 이 단지는 용적률(대지면적 대비 건물 연면적 비율)이 200%에 달해 사실상 재건축이 불가능하다. 현행 법규상 재건축할 때 용적률은 최대 300%까지 가능하지만, 임대주택이나 기부채납 면적을 빼면 실제 아파트에 적용되는 용적률은 250~270%에 그친다. 이 때문에 기존 주택 용적률이 200% 이상이면 재건축을 해도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해 사업 추진이 쉽지 않다.
경기 분당·일산·평촌 등 이른바 1기 신도시들은 본격적으로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상당수 아파트가 재건축이 불가능해 노후 아파트 대책에 비상이 걸렸다. 1990년대 초 입주한 1기 신도시 아파트는 모두 29만2000가구. 평균 용적률이 198%인 1기 신도시 아파트가 5년 정도 지나면 대거 재건축 대상에 포함된다. 추가 용적률 증가가 어려운 상태에서 아파트 가격이 과거처럼 오르기가 쉽지 않고,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심화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재건축 추진 동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30만 가구에 이르는 1기 신도시 노후화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규모"라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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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용적률 문제 등 재건축 암초
건설·부동산업계에선 신도시 아파트 노후화 문제를 풀 방법으로 리모델링을 내세우고 있다. 리모델링은 아파트 단지 전체를 허물고 새로 짓는 재건축과 달리, 건물 뼈대는 남기고 증축하는 사업 방식이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는 41곳. 분당·평촌 등 1기 신도시에서도 재건축보다는 리모델링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분당 A아파트 조합장은 "5년 후면 분당에만 30년 이상 된 아파트가 180개 단지에 달한다"며 "10년, 20년을 기다려도 재건축이 된다는 보장이 없어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합수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1기 신도시를 중심으로 기부채납이나 임대주택 의무 비율이 없고 수직·수평 증축을 허용하는 리모델링을 선택하는 단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도 10년 넘게 재건축 사업에 난항을 겪은 단지들이 리모델링을 선택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C아파트는 지어진 지 43년 됐지만, 용적률이 263%에 달해 재건축 추진이 되지 않고 있다. 이 아파트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는 "리모델링이 되면 일반분양 가구도 생기고, 집값도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내 집은 내 돈 들여 고친다"
서울과 수도권 노후 아파트는 리모델링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수요가 부족한 지방 중소도시 노후 아파트는 마땅한 대책이 없다. 1억원 이상 분담금을 내고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을 해도 투자금을 회수할 만큼 아파트값이 오를 가능성이 작기 때문. 박신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재건축을 통해 돈을 불려 나가는 것만 생각하는데 인구가 줄고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재건축 재테크'는 효력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결국 집주인 스스로 노후 주택을 잘 보수·관리하면서 자산 가치가 떨어지는 걸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실장은 "개별 아파트 단지 장기수선충당금을 모아 펀드로 전환, 환경 개선이 시급한 단지에 먼저 빌려주고 회수하는 방법도 있다"며 "단지 정비로 상승할 재산세 상승분을 담보로 사업비를 빌려주는 'TIF(조세담보금융)' 도입도 검토할 만하다"고 했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낡은 아파트를 내버려두면 도시가 슬럼화되고, 결국 도시 경제도 같이 죽는다"며 "경제 활성화와 도시 재생 차원에서도 낡은 아파트를 개선하는 데 공공과 민간 자본 투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