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적성 찾아주는 실리콘밸리… 대치동 학원 보내는 판교밸리

    입력 : 2017.03.21 03:03 | 수정 : 2017.03.21 07:26

    [사교육을 다시 생각한다] [4]

    ㅡ 선행학습 모르는 美 실리콘밸리

    학생 흥미 따라 맞춤형 수업, 방과 후엔 축구 등 클럽 활동
    부모들 "주입식교육 의미없어"


    지난 1일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마운틴뷰에 있는 발도르프(Waldorf)스쿨 6학년 교실. 학생 20여명이 둥글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교사가 인체의 귀 구조에 대해 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자 학생들은 연필로 노트에 필기했다. 교실 어디에도 PC와 스마트폰, 태블릿PC는 물론 TV도 볼 수 없었다. 이 학교 샌디 슈메이더 교사는 "일부러 모든 전자 기기나 IT 관련 수업은 배제한다"며 "토론, 체험 등을 통해 학생 스스로 적성을 찾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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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마운틴뷰에 있는 칸랩스쿨 학생들이 야외에서‘길거리 미술과 표현의 자유’수업을 듣고 있다. /칸랩스쿨 페이스북
    마운틴뷰는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 본사가 있는 곳이다. 발도르프스쿨 재학생 부모 중 절반 이상이 구글이나 애플 같은 IT 기업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오히려 수업에서 의도적으로 IT를 배제하고 학생들에게 체험, 교감, 예술 활동 등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마운틴뷰 발도르프스쿨의 인기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최전선인 실리콘밸리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알트스쿨(Altsch ool)은 학생 개인별로 맞춤형 수업을 제공해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 목표다. 학생 관리용 소프트웨어로 학생 개개인의 적성과 흥미, 수업 참여도 등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나이 대신 흥미와 적성에 따라 학생을 분류해 가르치고 있다. 현재 알트스쿨의 학생 관리용 소프트웨어는 공립학교로도 퍼지고 있다. 온라인 교육 서비스로 잘 알려진 칸 아카데미가 2014년 마운틴뷰에 설립한 칸랩스쿨의 수업 방식도 학생 적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실리콘밸리에서 주목받는 학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과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 흥미에 따라 다른 '맞춤형 수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국·영·수 교과 사교육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교육이 아니라 공교육이 작동해 학생들의 개성과 잠재력을 찾아주고 있는 것이다. 보통 방과 후엔 학교 방과 후 수업이나 클럽 활동으로 축구, 체스, 피아노 등을 배운다. 간혹 교과 사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다. 우리처럼 학교 진도를 미리 나가는 '선행 학습'은 개념 자체가 없다고 실리콘밸리 부모들은 전했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중 상당수는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술적인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은 대학 들어가서 해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IT 기업 시스코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 아흐마드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좋아하는 수업 위주로 듣게 한다"며 "학교 수업과 방과 후 클럽 활동을 통해서 충분히 원하는 걸 배우기 때문에 굳이 사교육으로 다른 걸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ㅡ 사교육 못벗어나는 韓 판교밸리

    학교 끝나면 학원으로 직행
    부모들 "시대 변하는 건 알지만 안 보내면 혼자 뒤처질까 불안"


    지난 17일 오후 판교의 A초등학교 정문 앞. 노란색 학원 승합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수업 끝난 학생들을 학원으로 나르려는 차량 행렬이었다. 부모들의 '학원 라이딩' 승용차도 꽤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학교 앞 네거리 상가에는 층별로 '○○○ 어학원' 'XX 수학학원'이라고 적힌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학원 밀집 지역 운중동 편의점에는 빵과 우유로 '혼밥'(혼자 밥 먹는 것) 하는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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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판교테크노밸리 부근에서 수업 끝난 학생들을 학원으로 실어 나르려는 차량들이 줄을 서 있다. /고운호 기자
    판교테크노밸리는 한국 IT 산업의 전초 기지이자 스타트업의 산실이다. 안랩·한글과컴퓨터·NHN엔터테인먼트·넥슨코리아·카카오게임즈·엔씨소프트·네오위즈·SK플래닛 등 내로라하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몰려 있다. 하지만 판교테크노밸리 종사자 자녀들의 방과 후 모습은 '사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기 성남교육지원청 관계자는 "판교는 강남 못지않게 교육열이 매우 높다"며 "요즘엔 컨설팅 학원이랑 카페형 독서실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시의 교과목 학원 수는 작년 1월 980개에서 지난달 1051개로 꾸준히 늘고 있다. 판교 직장인 자녀 중엔 중·고생이 되면 판교를 벗어나 분당 수내동·정자동이나 강남 대치동 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많다.

    취재진이 인터뷰한 판교 학부모들은 "사교육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창의성이나 사고력, 미래 직업의 효용성 등을 생각하면 사교육이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뒤처질까 봐' '좋은 대학에 못 갈까 봐'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B(44)씨는 초등 2·4학년 두 자녀의 수학·영어·논술 등 사교육비로 월 200만원쯤 쓴다. IT 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지금 직업도 다 사라진다는데, 한 달에 몇백만원씩 들여 학원에 보내야 하나'를 놓고 밤샘 토론까지 벌인 적도 있다. B씨는 "나도 창의성 기르려면 애들을 학원이 아니라 밖에서 뛰어놀게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막상 내 아이를 기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며 "학교도, 대학도, 기업도 창의력 있는 인재를 원하지 않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부모들이 용기 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테크노밸리에서 만난 아빠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테크노밸리에서 근무하는 박모(45·자녀 고1, 중1)씨는 "직장 동료끼리 학원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면서도 "교육 주도권을 갖고 있는 아내들이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하면…'이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더라"고 말했다. 맹모(47)씨는 "애들은 뛰어놀면서 배워야 하고 공부도 스스로 해야 효율이 높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 애도 다른 애처럼 학원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교육학과 송기창 교수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급변하는 시대에 이래도 될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사교육 레이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불안하기 때문에 사교육에 기대고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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