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울 삼을 '타인' 실종된 세상…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입력 : 2017.03.18 03:02

    '피로사회' 한병철 교수 새 저서
    익숙한 것들로만 가득 찬 사회… 나를 각성시킬 他者 자취 감춰

    "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와 타자, 긴장 속에서 만나 서로 변화시키는 길 마련해야"

    타자의 추방 책 사진

    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이재영 옮김|문학과지성사
    133쪽|1만2000원

    조선 영조 때 문인 이덕수의 아내는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남편이 바둑을 둔다는 얘기를 듣곤 "당신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마음이 기뻤는데 지금 어찌하여 이러는 것이냐"며 꾸짖었다. 아내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렸겠지만, 상처(喪妻)한 이덕수는 묘비명에서 "성품이 강직하고 발라서 내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옳은 것으로서 깨우쳐 주었다"며 탄식했다.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새 책 '타자(他者)의 추방'을 보면서 문득 이 얘기가 떠올랐다. 그에게 '타자'란 '두려움의 대상'이자 '나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개념이 아닌가? 그 반대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한병철에게서 '타자'는 '나'에게 당혹감과 고통을 주면서도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나를 각성시키고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다. 그런데 21세기엔 이 같은 진정한 '타자'는 자취를 감추고 온통 익숙한 것들만 판을 치게 됐다. 이 현상은 디지털 시대의 병폐로 자리 잡아 인류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지난해 2월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로 버스가 불타고 있다. 한병철 교수는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테러에 대해 ‘세상을 동일한 모습으로 만들려는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본다.
    지난해 2월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로 버스가 불타고 있다. 한병철 교수는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테러에 대해 ‘세상을 동일한 모습으로 만들려는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본다. /AP 연합뉴스

    그러니까 이 책은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란 사르트르의 말에 "아니다, 나와 같은 것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다"라고 응수하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우스갯소리에 "그래, 남이어야 한다"고 반격하는 셈이다. 지금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내게 낯익은 것들뿐 아닌가? 세인(世人)의 평준화된 취향에 거스르지 않는 상품과 정보들이 무수히 유통되지만 어디서도 나의 의식에 변화를 일으키는 '낯선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병철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같은 것'이 창궐한 모습을 이렇게 짚는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친구와 팔로어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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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 Images Bank

    저자의 사유는 '폭탄을 터뜨리는 것과 셀카(셀프 카메라)를 찍는 행위는 타자의 실종이 가져온 결과라는 점에서 같다'는 데까지 이른다. 테러리즘은 모든 걸 동일하게 만드는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고, 셀카는 공허감에 빠진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이라는 것. 잠언 스타일의 문장은 '같게 만들기'의 주체로 지목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질타로 이어지며, 저자의 명성을 높였던 전작 '피로사회'의 논리와 만나게 된다. "착취자인 타인은 이제 없다. 오히려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해결책은 타자의 복권(復權)이다. 타자에게 윤리적 우선권을 주며, 그를 환대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미덕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작업을 수행해야 할 통로로 예술과 철학을 제시한다.

    '타자의 추방'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한병철의 또 다른 저작 '선불교의 철학'은 과연 그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읽힌다. 2002년 독일에서 첫 출간된 이 연구서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불립문자·不立文字)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며(교외별전·敎外別傳) 인간의 마음을 직관해(직지인심·直指人心) 본성을 깨닫는다(견성성불·見性成佛)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서양철학의 개념들과 비교하며 통찰한다.

    선불교의 철학 책 사진

    선불교의 철학

    한병철 지음|한충수 옮김|이학사
    196쪽|1만2000원

    저자는 선불교의 '아무것도 아님(무·無)'과 '비어 있음(공·空)'이란 개념에 주목한다. "비어 있음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개방적인 것이다. 물러서서 고립되어 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空)과 무(無)는 허무주의와 회의주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최고로 긍정하고 대립의 긴장을 조성한다." 새 저작과 나란히 놓고 볼 때 이 '빈터'는 '나'와 '타자'가 다시금 긴장 속에서 서로 만나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타자에 대한 친절을 의미하는 자비(慈悲)의 개념 역시 새롭게 해석된다. 중심에 '무'가 있다는 것은 중심이 비었다는 것이며, 빈터에서 부드러워진 만물은 중심과 주변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서로를 친절히 대한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의 공활함과 유연함이 '타자 상실'의 난국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다만 책 곳곳에 일본 단시(短詩)인 하이쿠(俳句)를 지나치게 많이 삽입한 것은 조금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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