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부역자' 한마디면 인생 끝난다?

    입력 : 2017.03.18 03:10

    국정 농단 사태 이후 수개월… 대한민국 그런대로 순항해
    박 전 대통령 탄핵당했지만 국가 반역 행위 없었는데도
    해야 할 일 한 공직자들에게 '부역자' 낙인 찍기 시작돼
    권력 싸움의 다른 이름일 뿐

    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서울대 법대, 연세대 경제학, 한양대 의대…. 자식이 들어가면 부모가 자랑할 학교들이다. 박영수 특검팀이 국정 농단 사건으로 기소한 30명 리스트에는 김기춘·최지성·조윤선·이재용 등 서울대 출신이 9명, 의과대학을 나온 사람이 4명, 모교 출신 이화여대 교수가 3명이었다. 유무죄와 별개로 이렇게 다수의 '역대급 엘리트'가 기소된 사건이 있었나 싶다. "서울구치소 개소 이래 최고 학벌"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잘나가던 사람들이 숱하게 쇠고랑 찼어도 대중의 분노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최순실 특검에 반대한 A급 최순실 부역자 리스트'에 국회의원 이름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고, '세종시를 반대하는 이들은 최순실 부역자들입니다' '법원 내 최순실 부역자가 숨어 있다' 같은 말이 줄줄이 나온다. 중·고생까지 '부역(附逆)'이란 단어를 쓴다.

    손가락 부대만 쓰는 용어는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고위직과 진보 학자들 모임인 '한반도평화포럼'은 정부에 대고 이렇게 요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통일·외교·안보 관료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 각 부처의 공무원들이 더 이상 부역 행위를 저지르지 말기를 당부한다."

    대통령 직무 정지 기간 93일을 합쳐 대통령이 몇 달간 손 묶여 지냈지만, 약간의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 없이 돌아갔다. 대통령이 탄핵됐다고 공무원들이 땡땡이치고 놀지 않은 결과다.

    그러나 이 '성실성'은 대선 이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대선을 앞두고 '입 조심'하는 상황이다. 대선 후 자리 다툼이 벌어지면 동료를 가리키며 "저자가 부역자"라 고해바치는 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새 정부는 '자기 사람'을 데려다 앉힐 것이고, 남은 자리를 두고 동료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부역'이 '능력'보다 유력한 잣대가 될 것이다.

    부역자(附逆者)는 '나라에 반역이 되는 행위를 한 사람'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개입을 방치해 헌법 수호 의무를 중대히 위반'했기에 탄핵을 인용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반역'을 한 건 아니다.

    '청산(淸算)'이 사적으로 이뤄질 때 비극은 커진다.

    프랑스는 4년간 독일에 점거당했다. 1940년 6월 16일 프랑스의 온천 도시 비시(Vichy)에 앙리 필립 페텡 정권이 세워진 날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다. 해방이 되자 누군가는 죽어야 했다. 주로 레지스탕스가 주도한 사적 처형으로 길거리나 숲속에서 약 1만명이 맞아 죽거나 목 매달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여성 2만명은 '삭발형'을 당했다. "여성 부역자를 체포한 다음 강제로 머리를 깎고 때로는 옷을 찢거나 구타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여성의 부역 행위는 정치·경제적 협력 혹은 밀고보다 독일인과 '(애정·성)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가 57%를 차지했다. 독일 여자를 사귄 남성이 삭발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이용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새 정부는 재판소를 만들어 4000만명 국민 중 35만명의 '부역' 혐의를 조사했고, 이 중 사형 1500명을 포함해 9800명에게 실형을 내렸다.

    이용우 교수는 '여성 삭발식이 군중의 억눌렸던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고 썼다. 성난 군중에게는 당장의 분노를 투사할 대상이 필요한데 그것이 독일군과 만났던 프랑스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

    할 일을 한 사람과 '최순실 농단'을 이용하거나 용인해 이익을 적극적으로 챙긴 사람은 구분해야 한다. 짧은 기간 탓에 특검 수사가 미치지 못한 부분도 많다. 검찰이 남은 수사를 철저히 끝내 '벌할 사람, 아닌 사람'을 빨리 구분 지어야 한다. 무엇보다 밥그릇 싸움의 다른 이름으로 '부역자 논쟁'이 벌어지는 걸 막으려면 정권 쥘 사람들부터 그 단어를 신중하게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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