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80골 먹고 1골 넣었던 '이상한 국가대표팀'… "평창올림픽 목표는 1승"

    입력 : 2017.03.18 03:02

    日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서 중국에 이긴 女아이스하키팀

    다양한 선수 구성
    고교 1학년 재학생부터 음대 피아노 전공자까지
    선수 나이 16~33세 제각각

    초기엔 대표팀에 지원 없어
    선수들이 장비 마련하고
    태능선수촌선 저녁도 안줘… 분식집·중국집서 배달시켜

    귀화 통해 선수 보강
    2014년 올림픽 출전 결정후
    캐나다·美 교포선수 영입… 감독도 미국 출신 데려와

    우리가 국가대표하는 이유
    "희생이라고 생각한적 없어
    직업은 나중에 선택 가능…
    하키는 지금만이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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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고교 1년생부터 피아노 전공자, 의대 휴학생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졌지만 목표는 똑같다.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1승을 거두는 것이다. 대표팀 주장 이규선은 “우리 모두 아이스하키에 제대로 미쳐 있다. 평창올림픽에서 승리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 박상훈 기자
    이상한 국가대표팀이 있다. 대표 선수 나이는 16~33세로 제각각이다. 고교 1학년생부터 음대 피아노 전공자, 의대 대학원 휴학생도 있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팀이다. 지난 14일 오후 8시 서울 태릉선수촌 빙상장은 이들의 훈련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10㎏ 넘는 장비를 착용한 선수들이 얼음을 지치며 퍽(puck·아이스하키 공)을 치는 소리였다.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 랭킹 23위 한국은 지난달 23일 일본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16위 중국을 맞아 연장 끝에 3대2로 승리했다. 중국 상대로 치른 공식 경기 첫 승리였다. 14년 전만 해도 1대30으로 졌던 나라였다. 실업팀은커녕 중·고교 팀도 없는 빙상 불모지에서 이룬 성과다. 대표팀은 내년 열리는 평창올림픽에서 1승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게 목표다.

    태릉선수촌에서 처음엔 밥도 안 줘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팀은 1998년 창단됐다.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출전이 목표였다. 당시엔 동호회나 피겨 스케이팅,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출신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 관계자는 "쇼트트랙이나 스피드 스케이팅 출신 선수들은 트랙을 반시계 방향으로만 돌다 보니 시계 방향으로 방향 전환이 어려워서 애를 먹었다"고 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3전 전패. 일본전 0대25, 중국전 1대15, 카자흐스탄전 1대17로 패했다. 첫 해외 대회에 출전한 2003년 일본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5개 팀 중 꼴찌였다. 80골 먹고 1골 넣었다. 중국(1대30), 일본(0대21)에 패했다. 가장 근소한 차이로 진 게 북한전(0대10)이었다.

    지원도 거의 없어서 선수들은 스스로 장비를 마련해야 했다. 2000년부터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주장 이규선(33) 선수는 "당시 다른 나라 선수들은 가볍고 강한 탄소 소재 스틱을 사용하는데 우리만 나무 스틱을 썼다"고 했다. 훈련 장소가 부족해 빙상장이 아닌 맨땅에서 슛 연습을 하고, 체력 훈련은 불암산을 오르내리는 게 거의 전부였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태릉선수촌에서 저녁을 주지 않아 근처 분식집이나 중국집에 배달을 시켜 빙상장 복도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올림픽 출전은 꿈도 못 꿨다. 국제 아이스하키 대회는 실력 차를 감안해 그룹별로 경기를 치르는데, 올림픽에는 최고 그룹인 월드챔피언십(8개 팀)에 들거나 올림픽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출전권이 생겨야 나갈 수 있다. 현재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4번째 그룹인 디비전 2A에 속해 있다. 2011년 길이 열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로 평창이 선정되면서 자동 출전 기회가 생겼다.

    페이스북으로 외국 선수 귀화 추진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대표팀은 선수 보강에 나섰다. 아이스하키협회는 해외에서 뛰는 선수를 귀화시키기로 했다. 조건이 붙었다. "조직력을 위해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에 한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스하키협회는 외국에서 뛰고 있을 교포나 한국계 선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013년 아이스하키 선진국인 미국·캐나다 대학리그 선수 명단 전체를 확보해 한국식 이름을 가진 선수들에게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선수가 되고 싶습니까?' 1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캐나다 대학 1부 리그 윌프리드 로리에대에서 주전 공격수로 뛰고 있던 대넬 임(24)이었다. 교포 2세인 임진경 선수였다. 임진경은 "처음엔 장난인 줄 알고 한국에 있는 삼촌을 통해 협회에 확인을 했다"고 했다. 이후 한국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사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임진경이 "프린스턴대에도 한국계 선수가 있다"고 소개한 것이다. 캐롤라인 박(28·한국 이름 박은정). 교포 2세인 그는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 프린스턴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한국 대표팀 영입 제의를 받았다. 그는 현재 컬럼비아대 의학대학원 휴학 중이다. 박은정은 다시 "하버드대를 나온 한국계 선수"를 추천했다. 랜디 희수 그리핀(29)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980년대 시카고로 이민해 미국인과 결혼했다. 그리핀은 열 살 때부터 아이스하키를 했고, 하버드대 생물학과에 입학한 뒤에도 여자 아이스하키팀에서 뛰었다. 2013년 듀크대 생물학 박사 과정을 다니다 초청받았다. 여기에 미국 미네소타 전지훈련 도중 만난 북미 여자 아이스하키 2부 리그 미네소타팀 소속 마리사 브랜트(25·한국 이름 박윤정)도 합류했다. 그는 1992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다. 브랜트는 미성년일 때 해외에 입양되면 복수 국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우리나라 국적법 규정에 따라 작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임진경과 박은정은 2015년 귀화했으며, 그리핀은 현재 귀화 절차를 밟고 있다.

    감독도 해외에서 데려왔다. 미국 출신 여성 감독 새라 머레이(29). 부친이 캐나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유명 감독이었던 앤디 머레이로 아이스하키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위스 여자 1부 리그에서 선수 겸 코치로 뛰다가 2014년 10월부터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맡았다.
    아이스하키에 제대로 미친 선수들

    이규선은 인생의 절반을 빙상장에서 보냈다. 고교 1학년 때인 2000년부터 17년 동안 대표 선수로 뛰고 있다. 남자 국가대표 출신인 아버지 영향으로 스틱을 잡았다. 대표 선수로 계속 뛰기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이규선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 그냥 답했다. 좋아해서 하는데 변명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공격수 한수진(30)은 피아노를 전공했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 연세대 음대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스하키를 1년 정도 하다 그만뒀다"며 "재수할 때 서울 목동 빙상장에서 우연히 아이스하키 경기를 본 후 다시 스틱을 잡게 됐다"고 했다. 아이스하키를 하느라 대학도 7년 만에 졸업했다. 2008년 1년간 일본 삿포로의 한 클럽팀에 아이스하키 유학도 다녀왔다. 한수진은 "딱히 꿈이 없어서 부모님 뜻대로 피아노를 배웠다"며 "아이스하키는 제가 선택한 길인 만큼 후회 없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인생은 더 이상 흥미 없다"고 했다.

    골키퍼 신소정(27)은 중1 때 대표팀에 뽑혔다. 그는 2013년 국내 대학에 다니다 실력을 키우려고 캐나다 대학으로 아이스하키 유학을 떠났다. 자신의 경기 동영상을 직접 캐나다 대학에 보낸 결과다. 대학을 졸업하고 올 시즌부터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NWHL(미국여자 프로아이스하키리그) 뉴욕 리베터스팀에서 뛰고 있다. 공격수 박종아(21)는 강릉 출신으로 중 2때 대표팀에 선발돼 서울로 유학 왔다. 태릉선수촌 인근에 방을 구해 거의 혼자 자취 생활을 하며 지내왔다. 현재 캐나다대 여자 1부 리그 소속인 새스캐처원대 소속이다.

    선수들에게 "왜 많은 걸 희생하면서 아이스하키를 하느냐"고 묻자 귀화 출신부터 고등학생 선수까지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희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고 후회 안 해요. 직업은 나중에도 선택할 수 있지만, 아이스하키는 지금 이 순간만 할 수 있으니까요. 인생에서 열정을 따르지 않는 건 부끄러운 일이죠." 박은정의 말이다.

    평창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게 할 것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작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영국과 북한에 승리했다. 지난달 일본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일본(0대3)과 카자흐스탄(0대1)에 패해 4위를 기록했지만, 점점 실력이 늘고 있다. 외국 감독 영입 후 체계적인 훈련과 1년 두 차례 전지훈련, 귀화 선수의 가세 등이 실력의 배경으로 분석된다. 대표팀 선수들은 "최근 조직력이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머레이 감독은 이번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 카자흐스탄(18위)에 진 후 팀 미팅을 하면서 많은 걸 느꼈다고 했다. "연습 경기에선 여유롭게 이겨서 더 아쉬웠죠. 카자흐스탄만 이겼으면 은메달이었거든요. 경기 끝나고 모여서 힘든 여건 속에서도 왜 하키를 계속 해왔는지 얘기했어요. 그때 알았죠. '우리 모두 하키에 제대로 미쳐 있다'는 것과 '지금까지 견뎌낸 건 모두 팀원 덕분'이라는 걸요."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평창 동계올림픽 목표는 경기 후 애국가를 듣는 것이다. 금메달을 따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이스하키는 다른 구기 종목처럼 경기 전 양국 국가가 울리는 게 아니라 경기 후 이긴 팀 국가만 나온다. 빙상장에서 애국가를 듣기 위해선 무조건 1승을 해야 한다. 만만치 않은 목표다. 같은 조에 속한 스웨덴·스위스·일본 모두 최고 그룹에 속해 있다. 우리나라(세계 랭킹 23위)가 속한 디비전 2A그룹보다 3단계 위다. 일본(세계 랭킹 7위)도 올림픽에서 1승을 거둔 적이 없기 때문에 치열한 한·일전이 예상된다. 그리핀은 "우리 팀의 강점인 스피드와 승리에 대한 열정에 경기 경험을 더하면 충분히 이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이규선은 "우선 1승이 목표지만 정말 후회 없는 경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평창올림픽이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 경기가 될 거라고 얘기해요. 절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우리 후배들이 나중에 올림픽에 나가서 꼭 메달을 딸 거예요. 이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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