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리그 대학생 가르치는 '눈부신 실버'

    입력 : 2017.03.16 03:03

    ["내 나이가 어때서"… 60대 주부·은퇴 회사원, 재미교포 학생에 모국어 강의]

    - '세이글로벌'이 가교
    화상채팅 통해 "가갸거겨"
    창업 노하우도 전수해줘

    "역사·문화도 배울 수 있어" 배우는 수강생들 대만족

    "환갑을 넘어 예일대와 프린스턴대 학생들을 제자로 두게 될 줄이야…. 하버드대 교수라도 된 기분이에요."

    지난 1984년 8년간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30년 넘게 전업주부로 지낸 장인숙(62)씨는 요즘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한국어 선생님'이 됐기 때문이다. 아이비리그란 하버드·예일·프린스턴·컬럼비아·펜실베이니아·코넬·브라운·다트머스 등 동부 명문 8개 대학을 뜻한다.

    장씨는 1주일에 두세 차례 화상 채팅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의 제자들은 한국에 뿌리를 뒀지만 한국어가 서툰 재미교포 대학생들이다.

    고등학교 교사 출신인 장인숙(왼쪽)씨가 화상 채팅을 통해 미국 교포 대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 출신인 장인숙(왼쪽)씨가 화상 채팅을 통해 미국 교포 대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무역 회사에서 퇴직한 이계원(가운데)씨는 자료를 들여다보며 수업 준비에 한창이다. 이순정씨가 자신과 제자의 한글 이름을 써서 화상 채팅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 사람은 모두 미국 명문대에 다니는 교포 학생들에게 한국어 선생님을 연결해주는 사회적 기업‘세이글로벌’에 속한‘어르신 강사’로, 한국어뿐 아니라 역사·문화도 가르쳐주는‘살아 있는 역사책’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이글로벌
    장씨는 "단순히 한국어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뿌리를 알고자 하는 한국계 젊은이와 소통하는 것"이라며 "프린스턴대 제자에게 내가 경험한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해주니 '책보다 훨씬 생생하다'며 재밌어했다"고 했다.

    한국을 잘 모르는 제자들을 위해 장씨는 고궁이나 절 같은 전통 문화유산을 자주 찾아다닌다. 지난 8일에는 덕수궁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컴퓨터에 앉아 재미교포 유안진(25)씨에게 "지난 주말에는 궁에 다녀왔어요"라고 말했다. 유씨가 서툰 한국말로 "선생님 '궁'이 뭔가요" 묻자 장씨는 스케치북에 크게 글자를 써서 보여주고 "몇백년 전 왕이 살던 집을 말해요"라고 답했다.

    정성들여 가르친 덕분에 사제(師弟) 간 정도 깊다. 장씨의 첫 제자인 예일대 학생 이상원(22)씨는 군 복무 때문에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장씨를 찾았다고 한다. 장씨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며 "한때 포기했던 교사라는 꿈을 이룬 것 같아 뭉클했다"고 했다.

    지난 2010년 무역회사에서 퇴직한 이계원(67)씨도 프린스턴대와 펜실베이니아대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옛날에 미국 출장 길에 멀리서 프린스턴대를 보고 동경했었는데, 그 학교 학생을 직접 가르치다니 신기하다"고 했다. 그는 "젊은 제자들과 소통하며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닫곤 한다"며 "최근에는 한 남학생을 화상채팅으로 가르치는데 자기 동거녀를 당당히 소개해 놀랐다"고 했다.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한 이씨는 "최근 펜실베이니아대 출신 제자 알렉스가 한국에 와서 스타트업을 시작했는데 창업 노하우를 전해줬다"고 했다.

    예순을 넘긴 이들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은 스타트업 세이(SAY)글로벌이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세이라는 이름은 '어르신과 젊은이(Seniors And Youth)의 약자로, '어르신과 젊은이가 함께 말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프린스턴대에 다니다 서울 용산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했던 조용민(25)씨가 2014년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최연소 강사가 57세일 정도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층 20여 명이 한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어르신 강사들은 "노인 일자리는 지하철 택배나 경비원 등 단순 업무가 대다수인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 기쁘다"고 말한다. 강사 이순정(여·57)씨는 "한국을 대표해 외국인 학생과 만나는 만큼 책임감을 느낀다"며 "1시간짜리 수업 하려면 보통 2~3시간씩 준비하고 리허설도 한다"고 했다. 학생들도 반응이 좋다. 중·장년층 강사는 한국어뿐 아니라 역사·문화도 가르쳐줄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책'이라는 것이다. 조연정 세이 대표는 "어르신들이 젊은 강사와 달리 점잖고 바른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점도 인기 비결"이라고 했다.

    세이는 여태껏 재능 기부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지난 1월 법인(法人)으로 등록하고 사업화를 시작했다. 학생이 각 수업(50분)마다 지불하는 금액의 절반 정도가 강사에게 돌아간다. 지난달 신임 강사 13명을 모집할 때에는 50여 명이 몰렸다. 조 대표는 "어르신들이 얼마나 양질의 일자리에 목말라 있는지 보여준다"며 "그분들의 경험·지식이 훌륭한 자산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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