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왜 그들은 가평 땅에 숨어서 명나라를 그리워했을까

입력 2017.03.15 03:04 | 수정 2017.03.15 10:35

[73] 가평 조종암의 비밀과 대동법의 숨은 주역 김육

1684년 가평 조종천변 암벽에 명 황제… 선조… 효종 글귀 새겨넣고 '조종암' 명명
명에 대한 고마움과 숭배·청에 대한 복수심 상징
명·청 교체기에 대륙 정세에 귀닫은 조선왕실 '오랑캐 타도' 외치다 정묘·병자호란에 나라 쑥대밭
조종암에 이어 화양 만동묘… 창덕궁 대보단… 명 멸망 후 '소중화' 자칭
실질 추구 '대동법' 시행한 합리주의자 김육 묘
을사조약 후 순국한 최익현… 조병세… 민영환… 삼충신 사당도 근처

박종인의 땅의 歷史
경기도 가평군 옛 이름은 조종현(朝宗縣)이다. 지금은 가평이다. 그 가평에 조종천이 흐른다. 물이 맑고 잔잔해 여름이면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조종암(朝宗巖)은 그 조종천변에 있다. 주소는 가평군 조종면(朝宗面) 대보리(大報里)다. 주차장도 없고 차 세울 갓길도 변변찮은 천변 도로 옆 산기슭이다.

1684년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는 가평에 흐르는 조종천변 바위를 조종암이라 이름 붙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5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굴종을 참지 못하고 산천을 떠돌던 허격 권유가 컸다. 허격은 "오랑캐 비린내가 서리지 않아 마음 두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백해명이라는 가평 사내와 함께 세 사람이 그곳 암벽에 큰 글자를 새겼다. 마음을 담아 새겼다는 그 글자는 22자다.

글자에 담은 마음

맨 왼쪽 위 가장 위에 새겨진 석자는 '思無邪(사무사)'다. 사특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경으로 쳐들어온 이자성 반란군 앞에서 자살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의종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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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가평 조종천 도로변에는 조종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망하고 없어진 명나라 황제를 기리고 오랑캐 청을 배격하는 조선 중화주의를 상징한다. /박종인 기자
그 아래 글자는 '日暮途遠 至痛在心(일모도원지통재심)'이다.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청나라에 복수를 다짐하는 효종의 시를 우암 송시열이 썼다. 오른쪽에는 '萬折必東 再造藩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이라 적혀 있다. '황하가 일만 번 굽이쳐도 동쪽으로 흐르니, 명나라가 도와서 우리나라를 되찾았네.' 선조가 내린 글이다. 명을 향한 고마움과 그리움, 청에 대한 복수심이 절절하다. 명나라가 망하고 40년이 지난 1684년 심심유곡 가평 천변에 담은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명·청 교체기와 조선중화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리학과 중화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나라, 조선이었다. 그런데 만주족이 만든 나라 후금이 명을 위협해 중원을 차지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실리주의자였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파워 게임 속에서 어느 편을 들지 않고 균형 외교를 실행했다. 중화주의자에게는 명에 대한 반역이라는 뜻이었다. 집권 세력인 서인파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렸다. 1623년이다. 그런데 문제는 명은 사라지는 나라였고, 대륙의 주인은 후금, 즉 청이라는 사실이었다.

가평
청은 조선에 화친과 교역을 요구했다. 조선은 거부했다. 평안도 작은 섬 가도(假島)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청을 자극하던 명나라 모문룡 부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1627년 정묘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했다. 이미 이괄의 난 때 한 번 한양에서 도주한 경력이 있는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조선은 항복했다. 조선은 청의 동생이 되었고,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집권 세력은 바로 복수에 들어갔다. 군사력을 통한 실질적인 복수전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사라진 명의 정신적인 적통을 조선이 잇는다는 조선중화사상, 그러니까 정신적인 복수극이 시작된 것이다. 동이(東夷), 동쪽 오랑캐였던 조선은 이제 중화의 정통 계승자이며 만주의 청은 북쪽 오랑캐(北狄·북적)에 불과하다는 논리였다. 왕자를 보내지도 않았다. 후금, 즉 청은 100만에 불과한 인구로 1억 명이 사는 명 제국을 위협하는 강력한 나라였다. 명분과 논리로 복수하기에는 커도 너무 컸다.

병자호란과 척화론

1636년 봄 청 태종이 황제에 추대됐다. 조선 사신들은 "오랑캐는 황제가 될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해 10월 청 태종이 조선 사신에게 말했다. "11월 25일까지 왕자를 보내지 않으면 전쟁이다." 조선은 전쟁 불사를 외치고 북쪽에 있는 산성(山城)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처럼 산성에서 전투를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청은 조선 실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청 태종이 편지를 보냈다. "내가 큰길로 곧장 한양으로 향해도 산성에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들의 붓대로 우리 군대를 물리칠 것인가?" 조선 권력층은 "첩자를 보내 청나라 정세를 파악하자"는 논의조차 비겁한 행위라며 힐난했다. 군사력 열세를 빤히 알고 있는 군부는 화전을 주장했고 대명의리라는 명분을 내세운 문신들은 전쟁을 주장했다. 두 달 뒤 병자호란이 터졌다. 청 태종이 직접 군사를 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천하 명장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평안도 의주 백마산성은 멀찍이 우회해 큰길로 남하해갔다. 서북쪽 부대 총사령관인 간신배 김자점은 전투를 포기하고 철군해버렸다.

강화도로 세 번째 도주극을 벌이려 했던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 농성전을 벌이던 인조에게 청 태종이 항복 국서를 보냈다. "지금 살려고 하는가? 마땅히 성을 나와 항복하라. 싸우려고 하는가? 또한 마땅히 급히 나와 싸우자. 두 군사가 맞붙으면 하늘이 스스로 처분함이 있을 것이다."

인조는 농성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나가 땅에 이마를 세 번 피가 나도록 처박고 항복했다. 1644년 명나라 내부 반란군 이자성 부대가 자금성으로 진입했다. 마지막 황제 의종은 자살했다. 중원은 청나라 손으로 들어갔다.

정신적 승리

소현세자와 동행했던 명나라 9인을 모신 대통묘.
소현세자와 동행했던 명나라 9인을 모신 대통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 수도 심양으로 끌려갔다. 10만(50만이라고도 한다)이 넘는 백성이 청으로 잡혀갔다. 심양에서 서양 문물을 접한 소현세자는 명나라 옛 신하 9명과 함께 귀국해 개혁을 꿈꿨다. 중화를 외치는 집권 세력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왕위에 앉혔다. 효종이다.

북벌을 꿈꾸던 효종이 죽었다. 전쟁으로 중화를 지키겠다는 말은 쑥 들어갔다. 정신적으로 오랑캐를 이기고 중화를 잇겠다는 조선중화사상은 더욱 세가 커져갔다. 현종에 이어 숙종이 왕이 되었다. 집권 세력은 명 최후 황제의 연호 '숭정'을 고집했다. 명 연호는 조선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사용됐다. 조종암은 바로 그 시대정신의 결정체였다.

조종암, 만동묘, 대동단

가평에 조종암을 만들 때 노론 당수 송시열(1607~1689)이 개입했다. 송시열은 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는 조선 중기 이후 정치의 핵이다.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집권 세력이었다.

명이 멸망한 지 1주갑(60년)이 되던 1704년 제자들은 송시열이 은거하던 충청도 화양계곡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기리는 사당이다.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다. 그해 조선 왕실 또한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했다. 역시 명 황제를 기리는 사당이다. 조선이 명을 이은 중화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조치였다. 청의 눈치가 보였는지 대보단은 창덕궁 깊숙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했다.

조종암 옆 대통묘에 있는 비석 글자
조종암 옆 대통묘에 있는 비석 글자. '永曆(영력)'은 명나라 유민들이 만든 남명의 연호다.
조종암은 이 같은 숭명배청(崇明排淸)과 조선중화(朝鮮中華) 사상의 시초요 상징이었다. 조종(朝宗)은 가평의 옛 이름이기도 했지만 '제후가 황제를 배알하다'는 뜻도 있었다. 더군다나 조종천은 만절필동(萬折必東),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아닌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많은 유림들이 이 궁벽한 가평을 찾아 제사를 올리곤 했다.

1831년 소현세자와 동행한 명나라 유민들 후손이 조종암 옆에 명 황제 사당 대통행묘를 세웠다. 유림 방문은 더 잦아졌다. 대통행묘는 지금도 명나라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비석에는 명 마지막 연호 '숭정(崇禎)' 대신 '영력(永曆)'연호가 새겨져 있다. 명이 망하고 잔존세력이 대륙 남쪽에 세웠던 남명(南明)의 연호다.

운악산에 새겨진 민영환

을사조약 후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이름.
을사조약 후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이름. 현등사 계곡에 있다.
소중화임을 자처한 조선은 문화적으로 찬란했다. 회화에서는 진경산수, 문학에서는 가사문학이 이 맥락에서 발전했다. 그러나 지배 세력 교체가 불가능한 신분제, 경제 행위를 천하게 여긴 풍조는 조선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 주변을 오랑캐 취급하고 무시한 자만심도 대단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전 내부대신 민영환이 자결했다. 을사조약에 항거한 민영환(자결), 조병세(자결), 최익현(단식 순국) 삼충신이 가평 운악산 현등사 입구 삼충단에 모셔져 있다. 계곡 암반에는 민영환 이름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조종암에서 30분 거리다.

김육과 대동법

조종암에서 청평, 양평을 거쳐 40분 거리 남양주에 김육(金堉·1580~1658) 묘가 있다. 주소는 남양주 삼패동 산29-1이다. 김육은 가평 사람이다.

임진왜란으로 거덜이 난 나라를 떠맡은 광해군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났지만 대동법은 국가 현안이었다. 기존 세법은 지역 특산물을 세금으로 받았다. 세금 확보도 문제였지만 징수 과정에서 특산물 업자의 횡포에 백성들이 견뎌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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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을 끝까지 책임진 개혁파 김육(金堉·1580~1658)의 무덤.
대동법은 이 세금을 토지 면적에 비례해 쌀로 내는 세법이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김육은 대동법 시행 책임자였다. 대지주 집단인 노론 세력이 반대했지만 김육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쌀 대신 화폐 징세까지 염두에 두고 상평통보 제작도 주도했다. 금속활자도 복원했다. 마차도 제조해 보급했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하였다."(효종실록) 그가 바로 조종암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묻혀 있다. 관념에 매몰된 흔적과 실질을 추구한 사내 흔적이 서로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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