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영애' '선거의 여왕'에서 탄핵까지…박근혜 영욕의 정치인생 20년

    입력 : 2017.03.10 11:25 | 수정 : 2017.03.10 14:46

    ‘정치인 박근혜’의 20년은 말그대로 영욕(榮辱)으로 점철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정치에 입문, 야당 대표를 거쳐 첫 여성 대통령에 오르는 동안 한국 정치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20년은 영남과 보수층을 기반으로 열성적인 지지층을 확보한 반면, 반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수세에 몰리다 탄핵 당할 만큼 극과 극을 달린 정치 인생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1952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큰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영애’(대통령의 딸을 가리키는 말)가 됐다. 1974년 어머니 육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면서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해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했다. 5년 뒤 아버지 박 전 대통령마저 김재규의 저격으로 숨지면서 ‘비운의 영애’로 긴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흉탄에 돌아간 부모의 피 묻은 옷을 빨며 울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훗날 박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 자산 중 하나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어머니 육영수 여사 참배객들을 맞는 모습. /조선DB

    27세의 박 전 대통령은 동생들과 청와대를 나와 육영재단 운영 등 외엔 특별한 직업이나 대외활동 없이 18년을 보냈다. 그동안 최태민 목사와 그 딸 최순실씨, 최씨의 남편 정윤회씨 등 극히 일부의 측근들에 의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시절 자신에게 등 돌린 이들에게 절망하면서 ‘배신’을 가장 혐오하게 됐고, 한 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 특유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됐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40대에 들어서 정치권의 영입 제안을 여러 번 받다가, 45세인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입당했다. 이 후보는 패배했으나 이듬해 박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그는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했다. 이때부터 박정희 시대 유산은 고스란히 박 전 대통령에게 음으로 양으로 작용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이 두 번 연속 정권 창출에 실패한 뒤, 2004년 첫 여성 당수가 됐다. 이후 한나라당 ‘차떼기 정치자금’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도 ‘천막 당사’를 발판 삼아 당 회생을 이끌면서 보수의 잔다르크, 우파의 구원투수로 떠올랐다. 2006년 지방선거 때 면도칼 테러를 당하고도 “대전은요?”라며 선거를 챙기는 식으로 여론을 움직였고, 2년 3개월간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04년 3월 24일 차떼기당 파문이 일 당시 한나라당 현판을 당사에서 떼내 천막당사로 옮기던 모습. /조선DB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첫 도전한 대선에서 당내 경선의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승복, 이명박 후보를 도와 정권교체에 기여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안 개정에 반대하는 등 이 전 대통령과는 내내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MB계가 주도한 당의 ‘친박계 공천 배제’에 반발해 뭉친 ‘친박 연대’를 방조하면서 친박 세력이 보수 여권 지지세력의 전면에 나설 기반을 마련했고, 박근혜 개인의 신화적 존재감도 더욱 커졌다. 그는 2011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에서 패배한 뒤 다시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등판했고, 이듬해 총선을 또 승리로 이끌었다. 직후 압도적 지지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정해 전임 이명박 정권과 차별화 했다.

    박근혜 후보는 2012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남성 위주의 정치판과 보수적인 한국 정서 속에서 미혼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한 것은 ‘대한민국과 결혼해 사심이 없고 친인척 비리의 여지가 없다’ ‘뒷거래가 아닌 원칙으로만 승부해 나라를 바로세우겠다’라는 그의 다짐 덕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조선DB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초 ‘국민행복국가’를 기치로 걸고 규제 혁신을 통한 경제 활성화, 통일 대박론과 적극적 외교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 노력, 원칙과 신뢰라는 새로운 정치·사회의 기준 제시, 4대 부문 개혁을 통한 적폐 청산과 비정상의 정상화 등을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그러나 잇따른 총리 후보의 낙마 등 인사 사고와 불통(不通) 논란으로 위기가 시작됐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정부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진보 진영 반대 세력의 공세에 부닥쳤다. 세월호 참사는 당일 대통령 행적 논란이 국회 탄핵 소추안에도 포함될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을 오랜 기간 괴롭혔다.

    박 전 대통령은 임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당내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 비박계와 갈등을 빚고, ‘친박 패권주의’가 비판 받으면서 당내 응집력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소신이었던 국정 역사 교과서 도입이 추진되자 야당 등 반대세력은 급속히 결집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임기 후반에 들어서도 핵심 지지층의 도움을 받아 30% 안팎의 공고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지난 해 7월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지 기반이 흔들렸다. 그 해 10월 서울 도심에서 퇴진 요구 촛불시위가 잇따랐고 12월 국회는 탄핵 소추안을 가결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 전 수 차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자진 사퇴를 위한 정치권 합의 등을 막판에 제안했으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민심을 되돌리진 못했다.

    탄핵 정국이 장기화하면서 상황 변화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 ‘태극기 집회’ 등을 통해 탄핵 반대 운동에 본격 나선 것이다. 박 전 대통령도 인터넷 1인 방송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최순실과의 공모 관계를 부인하면서 반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인용을 결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0월 25일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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