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중의 생로병사] 老年, 약에 파묻힌 삶에서 탈출을

    입력 : 2017.03.07 03:14

    갑자기 쇠약해진 85세 할머니, 알고 보니 약물 과다 복용 때문
    약 귀했던 시절을 산 고령자들, 사소한 건강 이상에도 약에 의존
    정상 노화를 질병이라 생각 말고 약 줄여야 건강하게 오래 살아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올해 85세인 이모 여사는 지금까지 큰 병치레 없이 잘 지냈다. 수술도 받은 적이 없다. 동네 병원에서 고혈압약을 타 먹고 가끔 무릎 관절 물리치료를 받는 정도다. 그 나이에 누구나 있는 일상이다. 멀쩡히 지내오다가 석 달 전부터 가래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래 증가는 최근 들어 전국 노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일 게다. 호흡기내과 의사들은 공기 중 미세 먼지 증가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노인들은 숨을 뱉는 힘이 약해서 제대로 배출하지 못한 가래가 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여사는 동네 병원에 가서 '가래약'을 지어 먹었다. 이후 수차례 진료를 더 받았지만, 답답함은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 식욕이 확연히 꺾이고 실제로 먹는 양도 눈에 띄게 줄었다. 전신 쇠약감마저 나타나자 대학 병원 노인병 내과를 찾게 됐다. 혈액·소변 검사도 하고 가슴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고혈압 말고는 병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폐렴으로 볼만한 병세도 없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약간 높은 수준이었다. 식욕 저하와 식사 부족이 호르몬 이상인가 싶어, 갑상선 기능 검사, 부신피질 기능 저하증 검사도 했으나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우울증 검사도 정상, 인지 기능도 괜찮았다. 일상생활을 혼자 했던 것으로 보아 노쇠 상태도 아니다.

    의료진은 이 여사에게 그동안 먹다 남은 약을 다 갖고 오라고 했다. 거기서 전신 쇠약 단서가 잡혔다. 그는 그동안 두 병원을 번갈아 다니며 14가지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새로운 증상을 호소할 때마다 약이 하나씩 늘어난 결과다. 일단 가래가 끓어서 숨 쉬기 답답하다고 하니 거담제, 기관지염 치료제, 천식약이 들어갔다. 손발이 시리고 혈액 순환이 안 된다고 하니까 말초동맥 순환 개선제와 항혈소판제,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고 하니 주의력 증강 약물과 치매 치료제, 콜레스테롤치가 높으니 강하제, 잠이 안 온다고 하니 항불안제와 수면제. 소화도 안 되고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하니, 복부 경련 완화제, 위염 치료제, 위장관 운동 촉진제 등이 붙은 식이다. 또 다른 병원에 가서는 간 기능 개선제와 골다공증 치료제도 처방받아 먹었다. 평소에 먹던 건강 기능 식품까지 포함하면, 가히 노년 약물 종합 세트라 할 만하다.

    [김철중의 생로병사] 老年, 약에 파묻힌 삶에서 탈출을
    /이철원 기자
    의료진은 환자의 전신 상태와 병력을 봤을 때 이렇게 약을 많이 먹을 필요가 없다고 봤다. 외려 전신 쇠약과 급격한 식욕 부진이 과다 약물 복용 때문이라고 보고, 환자를 설득해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만 남기고 나머지는 복용을 중단시켰다. 골다공증 약물은 주사제로 바꿨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할머니는 예전으로 돌아왔다. 다시 식사도 잘하고, 혼자서 시장도 잘 쏘다닌다.

    이 환자 얘기를 들려준 노인병 내과 전문의는 주변에서 종종 접하는 전형적 한국 노인 환자의 약물 과다 복용 행태라고 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노인의 사회학이 담겨 있다. 현재 고령 세대는 대부분 가난했던 경험을 공통으로 안고 있다. 의료 서비스 문턱이 높은 시절을 겪었던 세대다. 약이 귀했던 시대를 보냈다. 비싸고 독한 약일수록 몸에 좋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몸의 사소한 이상 증세도 약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약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양을 먹어도 거부감이 별로 없다. 반면 의사들은 약 달라는 환자에게 약을 안 줬다가는 병원 문 닫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분 전환용 가짜 약을 주려고 해도 의약 분업으로 처방전이 공개돼 선의의 거짓 처방도 힘들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약봉지가 산처럼 쌓인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다. 약효가 있으니 독성을 무릅쓴다. 약물끼리 충돌해 뜻하지 않은 후유증을 내기도 한다. 게다가 약물의 독성과 약효를 평가하는 임상 시험에는 노인보다 젊은 성인이 더 많이 참여한다. 노인에게는 약물 안전 평가가 취약하다.

    나이 70~80대 어르신들은 한국 고령화 첫 세대다. 늙는 데에 대비하고 고민하지 못한 채 어느덧 초고령 장수 사회 강물로 흘러가고 있다. 이들은 노화에 대한 이해가 적고 준비가 부족했다. 노인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노년기에는 다소 우울하고 불안하고, 소화도 더디고, 어느 정도 기억력이 떨어진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이라면 그건 정상 노화다. 그 모든 것을 질병으로 인식하고 약물로 해결하려 들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노화에 적응해가는 삶도 필요한 것이다. 이제 약 쌓아놓고, 약 권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자 병문안 가면서 약 같은 것을 선물로 가지고 가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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