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보기> 태극기집회를 '틀딱집회'라 부르면 안되는 이유

    입력 : 2017.03.02 13:14

    장군 갑옷을 입은 이는 북을 두드리고, 흰 무명 옷을 입은 이들이 태극기 덮은 상여를 멨다. 대통령 변호인단인 김평우 변호사는 ‘UCLA LAW’(미 UCLA 로스쿨)라는 글자가 새겨진 챙모자를 쓰고 연설했다. 비가 와도 좀처럼 벗지 않는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하나로 엮기 힘든 각종 상징이 뒤섞여있었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분명했다. ‘태극기 집회’가 젊은 세대가 표현하는 ‘동원된 틀딱들의 집회’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틀딱’은 ‘틀니를 딱딱거린다’는 뜻으로 보수 노인을 폄하하는 말이다. 1일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를 지켜봤다. 곁에서 지켜보니 몇가지 새로운 사실이 보였다.

    1. 동원된 사람들?
    태극기는 ‘촛불 쪽 인원은 돈 2만원씩 받고 동원됐다’고 주장하고, 촛불은 ‘누가 제 정신으로 태극기 행사에 나가느냐’고 한다.
    동원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영남지방에서 올라는 관광버스로 시내 버스전용차선이 꽉 찼다. “나라 구한다”는 이들을 태운 버스가 전용차선에는 노선버스만 선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촛불 쪽 관광버스도 그러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촛불도 그렇고, 태극기도 그렇고 ‘동원’이 아닌 ‘자발 참여’가 압도적이다.
    태극기 주최측의 ‘역대 최고’ 주장이 맞는 것이, 1일 태극기 현장에는 ‘초행’인 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남성 참가자들이 주력군이었지만, 막상 현장에는 50, 60대 여성들 너댓이 온 경우도 흔했다. 3대가 나들이 하듯 함께 손잡고 나온 경우도, 60대 남성 혼자 나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십대 서넛이 온 경우도 있었다.
    “태극기를 수의 삼아도 후회가 없다”는 자극적이고 격렬한 말이 마이크로 쏟아지고 있을 때, 혼자 온 60대 남성은 군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며 기자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기자는 이어서 3대 가족, 모자(母子)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을 찍어주면, 그들은 자신들이 사진이 얼마나 잘 나왔나 확인했다. 여러 차례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거의 처음이거나 한두번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로 생긴 놀이동산에 온 가족들처럼 보였다. 놀이공원에서 그렇듯, ‘나 거기 있었다’는 증명을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남측 세종대로에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제15차 태극기 집회. /연합뉴스

    2. ‘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태극기 쪽에서는 “촛불세력이 대한민국 저주하는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했고, 촛불 쪽 참가자는 “그들 머릿 속이 진짜 궁금하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각자가 사랑하는 나라의 모습이 있었다. 태극기 쪽은 ‘일제와 6.25, IMF’가 기억 속에 있다. 지금 이 나라가 가장 그래도 가장 살만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다. 젊은층들은 ‘나라가 왜 이 꼴 밖에 안되냐’고 한다. 그들의 오늘은 내일의 전날이다. 더 끔찍했던 어제를 판단의 근거로 삼는 이들과 더 나은 내일이 기준인 두 집단 사이 간극은 예정된 것이다. 이건 세대갈등에 가깝다. 2일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 “자식들과 싸우는 게 무서워서 못한 얘기를 여기서 한다”고 했다. 1일 광화문은 노년층의 격정적 해방구였다.

    3. 태극기는 무조건 박 대통령을 몹시 지지한다?
    현장은 ‘아이돌 생파(생일파티)겸 팬 미팅’ 현장을 방불케했다. 팬클럽 행사에서 ‘회고 영상’이 필수이듯, 박근혜 대통령을 우상화한 영상이 자주 보여졌다. 과거 동영상, 흑백사진을 배경으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낸 의견서를 전문성우인 듯한 이가 읽어내려갔다. 적잖은 이들이 이 영상에 환호했다. 대중의 주머니를 털려는 ‘극우 상업주의자’들의 자극적 발언은 박근혜 대통령을 ‘희생된 성녀’로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태극기 세력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숭배한다”는 주장이 사실은 아니다. 현장에서는 “최순실 그 미친 X 하나 때문에…” “박근혜가 최순실을 자르지 못해서…” “대통령이 칠칠치 못해서” 같은 얘기도 서슴없이 나왔다. ‘집회 속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은 따로 있었다.
    행사 초반, 유관순 여학교 36년 후배라는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을 때였다. “나는 일제시대, 전쟁, 분단을 다 겪었다.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나라냐. 정치가 우리를 태극기로, 촛불로 만들었다.…”
    참석자들이 크게 공감한 것은 “이 나라에서 얼마나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는가” 증언하는 대목이었다. 한국현대사가 곧 개인의 인생사였던 세대들은 자기 시대의 가치가 모두 부인되는 것 같은 현실에 대한 반발감이 큰 것 같았다. 현장에서 나눠주는 태극기 마크를 두고 “유치하게 저런 걸 뭐하러 다느냐”던 한 남성은 “젊은 판단은 모두 옳고, 나이든 이의 생각은 다 틀렸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했다. “대통령이 무조건 잘했다가 아니라, 마녀사냥 하듯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과정이 싫다”고 했다.

    4. 촛불의 모습이 ‘태극기’에서 재연됐다
    봄날 같던 날씨는 오후 서너시 지나며 다시 앙칼지게 변했다. 이어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비 덧입는 것이 어색하고 굼뜬 동년배를 위해 모르는 사람들끼리 서로 입혀주기도 했다. 어떤 집회 참가자는 귀가길 버스에서 하차하며 집회에 참가한 게 틀림없는 ‘빨간 모자’ 승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그들은 모르는 사이였다. 수십만명이 모여도 불상사 하나 없고 현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지 의식’을 느꼈던 촛불집회 모습이 ‘집회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 사이에서도 재연되고 있었다. “이런 데 나와 보는 건 처음”이라는 70대 할머니도 아마 그 대열에 있었을 것이다. 먹고 사느라 바빠 그 어떤 ‘대의’를 위해 광장에 나와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태극기 집회’는 새로운 정치적 유희였다.

    5. 너의 100만은 거짓, 나의 500만은 진실?
    주최측의 선동의 기술은 탁월했다. ‘탄핵 기각’이 되면 혁명이 날 것이라는 촛불측 주장이 데칼코마니처럼 태극기 집회에서도 재연되고 있었다. “여태까지 가급적 비폭력을 견지해왔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내 피를 가장 먼저 뿌리겠다”고 했다. ‘오늘 만오천보를 걸었다’며 스마트폰 만보계를 확인하다가도 ‘죽음으로 진실을 증명하자’는 선동에 박수를 치는 것이 어색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짜뉴스로 대통령이 탄핵됐다며 다른 가짜 뉴스를 말했다. 군중을 자극하려는 연사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정도는 심했다. 지난해 ‘촛불 100만’을 극구 부인하던 이들이 ‘500만명도 넘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군중집회가 가진 한계는 그 연령대가 크게 높아져도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광장의 군중이 가진 저력이자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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