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팝 컬처] 누구에게나 라라랜드가 있다

    입력 : 2017.03.02 03:05

    다시 본 라라랜드 명장면은 천문대서 꿈꾸듯 춤춘 모습
    별이든 인간이든 송사리든 드넓은 우주에선 모두 티끌들
    내 선택이 사랑이건 예술이건 다만 시간 속으로 흘러갈 뿐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나의 첫 '라라랜드'는 록밴드 보컬이었다. 그곳으로 날 초대한 사람은 중학교 친구 종수였다. 중2 때부터 드럼을 열심히 치던 그는 중3이 끝나가던 겨울 어느 하굣길에서 나에게 "스쿨밴드를 만들려고 하는데 보컬로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실로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그에게 말했다. "고맙지만 나는 그냥 음악을 좋아하기만 할래.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내가 자신 없었던 것은 노래 실력이 아니라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각각 다른 고교로 진학하면서 헤어졌고 서로 소식을 모른 채 지냈다. 몇 년 뒤 한국 록 최고 명반 중 하나인 시나위 1집이 나왔다. 앨범 뒷면에 종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종수는 시나위 1집 전곡의 드럼을 쳤고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비롯한 네 곡 가사를 썼다. 그 앨범 보컬은 임재범이었다. 그 뒤로 "그때 종수를 따라갔더라면 내가 임재범 되는 거였어"라고 허풍을 떨었지만 이미 그 라라랜드는 희미한 추억일 뿐이었다.

    미국 영화 '라라랜드'가 아카데미를 휩쓴 뒤 이 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 처음 봤을 때는 '라라랜드'가 LA의 별칭이면서 '비현실적인 상상 속 세계'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처녀작 '위플래쉬'가 워낙 정통 음악 드라마여서, '라라랜드'의 여러 영화적 장치들이 낯설기도 했다. 좋은 영화이지만 최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현우의 팝 컬처] 누구에게나 라라랜드가 있다
    /이철원 기자
    다시 봤을 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주인공 커플이 천문대에서 우주를 유영하며 춤추는 모습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 사이로 두 사람이 둥실 떠올라 춤을 춘다. 우주의 광대무변(廣大無邊)을 생각하면 인간은 말할 수 없이 초라하다. 한 인생에 걸쳐 온 힘을 쏟아 무엇을 이룬다 한들, 그것은 우주 속 티끌보다 작은 인간계(人間界)의 성취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나는 깨달았다. 저렇게 빛나는 별도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시간과 공간의 전체인 우주에서 어떤 것도 크다거나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므로 1000억개의 항성을 가진 은하계와 개울을 헤엄치는 송사리 한 마리의 가치는 정확히 동등하다. 우리가 재즈 피아노에 골몰하다가 돈과 명성을 잃거나 유명한 배우가 되느라 연인을 잃더라도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인가 좇느라고 나만의 라라랜드를 영화 속 '리알토 극장'처럼 폐업시켜 버린 것은 아니냐고 영화는 묻고 있다.

    영화 초반 남자 주인공은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친다. 이곳에서는 재즈를 연주할 수 없다. 사장과 손님 모두 소화(消化)와 대화(對話)를 돕는 음악만 원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크리스마스 캐럴 '아름답게 장식하세(Deck The Halls)'를 연주할 때는 조명이 식당을 고루 비추고 대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주인공이 갑자기 박자를 늦춰 캐럴을 재즈로 변주하자 조명은 주인공에게 집중되고 대화 소리는 사라진다. 이 한 곡의 연주 때문에 남자는 식당에서 해고되지만 동시에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영화의 또 다른 테마인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주변 모든 것이 나에게 집중된다. 태양은 정확히 나를 비추는 것 같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나를 향한 박수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희은이 노래한 것처럼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영화에서 두 번 나오는 천문대 공원 장면 역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 번은 사랑이 불붙기 시작했을 때, 나머지는 식어버린 재의 온기만 남은 상태다. 첫 번째 장면에서 둘은 하늘로 날아올라 춤추지만 두 번째 장면에서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여기 분위기가 별로네." "그러게. 최악이야." 두 사람은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말하지만 이미 라라랜드를 떠났다.

    이 영화는 상하(常夏)의 도시 LA를 배경으로 찍었지만 겨울→봄→여름→가을→겨울의 형식을 갖췄다. 그것이 재즈든 연기든 또는 사랑이든, 라라랜드는 사계절의 법칙으로 오고 또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어떤 종류의 겨울을 겪고 있다 해도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영화 속 남녀 역시 겨울에 만나 곧바로 봄으로 이행하지 않는가.

    누구에게나 라라랜드는 있다. 그것은 봄처럼 와서 여름처럼 무성했다가 가을처럼 시들고 겨울로 얼어붙는다. 이 영화의 미국 외 흥행 성적은 영국·중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계 3위다. 왜 한국인들이 이 영화에 유독 열광했을까. 이제 곧 봄이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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