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유권자 수는 광주·전남·전북 유권자를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 과거 보수 대선 후보들은 '결집된 TK표'가 '결집된 호남표'를 상대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부산·경남에서 우세를 더하고 수도권과 충청에서 접전을 벌이는 전략으로 갔다. 1990년대 이후 대부분 대선이 그랬다. 그런데 보수가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TK 와해'가 현실화되고 있다.
지금 보수 진영은 진공 상태나 다름없다. 이는 지난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도 재차 확인됐다. 출마 여부도 불확실한 황교안 총리를 포함한 보수 후보 지지율 합계가 10%였다. 그마저 흘러내리는 추세다. TK에서조차 보수 주자들은 야권 후보들에게 형편없이 밀렸다. 텃밭이 무너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 인사들은 "조기 대선이 본격화되면 복원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표정은 좋지 않다.
지금 TK 민심은 세대별 분화가 어느 때보다 심하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우선 정치 무관심층인 20~30대가 있다. 대구시장, 경북지사 이름을 모르거나 유승민과 유시민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가 태반이다. 그런 그들에게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탄핵"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40~50대는 세상 이치도 알고 정치 관심도도 가장 높다. 이들의 심리 상태는 '박근혜도 싫지만 거기다 대고 칼질하는 사람은 더 보기 싫다'로 요약된다. 누군가 정치 얘기를 꺼내면 "그만하자"고 손사래 치는 자포자기 상태라고 한다. 이 탄핵 국면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 2012년 박 대통령을 찍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들이 태극기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양상은 달라지겠지만 태극기에는 거리를 둔다.
마지막은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60대 이상 세대다. 그들은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박 대통령에게 과오가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끌어내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잘못될까 봐 잠도 못 자는 그 절박함을 너무 몰라준다"고 하소연하거나 "언론은 왜 촛불만 찬양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들에겐 '진짜 보수, 가짜 보수' 논쟁도, 태극기 집회가 과연 진정한 보수냐는 비판도 무의미하다. 6·25전쟁과 처참한 가난에서 체화된 경험에서 비롯된 국가 위기의식이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오늘 삼일절 집회에도 참석할 것이다.
헌재 선고까지 길게는 2주가 남았다. 어떤 결정이 나올지 속단할 수 없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든 TK 민심이 한쪽으로 극단화될 것 같지는 않다. 한 정치 세력에 묻지 마 지지를 줄 정도로 TK 민심이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징후는 친박이 내리꽂은 사람을 거부하고 무소속 후보를 여럿 당선시킨 작년 총선에서 이미 나타났다. TK에서 안희정 충남지사 지지율은 이달 초부터 계속 상승세다. 지난주에는 23%를 얻어 문재인(19%)을 제치고 1위 주자가 됐다. 적지 않은 TK 사람들이 "안희정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진영 정치를 청산하겠다는 안 지사의 행보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는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엔 분노·대결의 정치만으로도 다음 대통령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국민을 통합할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