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당신은 고교 성적이나 시험 점수가 아니다… 합격 결정 과정은 藝術"

    입력 : 2017.02.27 03:05 | 수정 : 2017.02.27 07:31

    대입 수능을 '시험대'에 올리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의 격정 토로

    "일 잘하는 사람은 '중요한 일'부터 하고, 일 못하는 사람은 '급한 일'부터 합니다. 다들 탄핵이나 대선 같은 급한 일에 빠져 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KTX에서 '급한 일이 많을 텐데 왜 저를 만나려나?'라고 혼자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중요한 일을 하려는구나'하고 여겼습니다."

    인사차 농담을 한 것이고, 김도연(65) 포스텍 총장과는 좀 사소한 일로 만났다. 시국(時局)과도 무관했다. 교육부 장관·울산대 총장·국가과학기술위원장 등을 지낸 큰 경력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대입 수능시험'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2017년 국어 영역 수능시험' 문제지를 실제로 풀어본 적이 있습니다. 총 45문항을 80분에 풀어야 합니다. 문제지는 16쪽입니다. 한 페이지를 5분 안에 부리나케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문(地文)은 길고 복잡합니다. 뒤의 열 문항은 시간이 부족해 아예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32문항을 풀었는데 21개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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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총장은 “컴퓨터로 채점해 60여만명의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게 대입 수능”이라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총장님의 전공이 이공계라 그런 게 아닐까요?

    "그래서 일부러 시험문제지를 갖고 왔습니다. 최 기자님은 국문학을 전공했고, 수십년째 글 쓰고 독서를 해왔으니 한번 꼭 풀어보세요. 아마 분노가 치밀 겁니다."

    ―왜 분노하게 됩니까?

    "다섯 개 답 중에서 적절한 것 혹은 적절치 않은 것을 골라내는 방식입니다. 간혹 '적절한 것을 있는 대로 고르시오'라고 묻기도 합니다. '있는 대로'라면 답이 두 개 이상이라는 암시가 됩니다. 그런데 정답이 하나인 경우에도 그렇게 묻습니다. 정부가 학생들을 상대로 '꼼수'를 부리는 겁니다."

    ―변별력과 난이도를 위해 그렇게 했겠지요?

    "이건 사고력 측정도 아니고, 문제를 배배 꼬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수능시험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경쟁'이지요. 올해 국어 영역 만점자가 0.23%, 약 1000명이 넘는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그런 함정에 안 걸려들기 위해 얼마나 훈련을 했겠습니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런 수능을 잘 본 학생을 '인재'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난센스입니다."

    ―우리 시절과 비교하면 요즘 학생들이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수들은 '옛날보다 학생 수준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똑똑한 학생들이 모두 서울대에 진학해 그런가 싶었습니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에게 물어보면 똑같은 답이 돌아옵니다. 요즘 학생들의 실력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겁니다."

    ―착시(錯視) 현상이랄까, 교수 입장에서는 지금 학생들과의 나이 차가 벌어지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전반적으로 실력 하향이 뚜렷합니다. 학생들이 교수가 제시하는 답에서 벗어난 생각을 못합니다. 대학에서 창의성 교육을 하라,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라고 주문받지만, 들어오는 학생들은 이미 중학교에서부터 점수 따는 훈련만 돼 있습니다. 그런 사고 습관으로 머리가 딴딴해져 있습니다. 무슨 창의성 교육이 되겠습니까."

    ―그런 시험 습관이 머리에 박혀서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겁니까?

    "수능시험 공부는 창의력을 죽이는 훈련인 셈입니다. 창의성은 정답을 고르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찾고 답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길러집니다. 우리 교육에는 숱한 문제가 있지만 우선 해결해야 하는 게 수능입니다."

    ―대입 수능시험은 나름대로 합의를 본 객관적 평가가 아닙니까?

    "하루 종일 다섯 개 답안 중에 정답 하나를 골라내고, 이를 컴퓨터로 채점해 60여만명의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게 수능입니다. 무토 마사토시 전(前) 주한 일본 대사가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혹독한 경쟁 사회다. 한국에서 수능시험을 보는 날에는 순찰차도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고, 듣기 평가를 보면 30분 동안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된다. 거의 인생을 건 싸움이 하루에 결정된다'고 썼습니다. 수능 당일에 감기 걸리거나 컨디션이 나쁘면 실제 인생을 망치게 되죠."

    ―어차피 시험이란 경쟁이고 순위와 당락을 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경쟁은 있어야 하지만 쓸데없는 경쟁을 시키지 말자는 겁니다. 다른 선진국에서도 다들 경쟁하지만, 우리처럼 점수로 쓸데없이 경쟁하지는 않습니다."

    ―수능 방식 외에는 다른 대안이 별로 없는 것도 현실 아닙니까?

    "프랑스에서는 고교 졸업 자격 시험(바칼로레아)을 일주일간 치릅니다. 매우 우수, 우수, 양호의 3개 등급으로 부여하지 우리처럼 점수로 줄 세우지 않습니다. 점수 93점이나 94점은 다 잘한 거지, 무슨 실력 차이가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1점 차로 대학 당락을 결정합니다."

    ―그게 뒷말이 없고 공정하다고 인식하니까요?

    "올해 바칼로레아의 철학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노동을 덜 하는 게 더 잘사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아는가' '욕망은 본래 무한한 것인가' '우리의 도덕적 확신은 경험에 기초하는 것인가'. 수험생이 이 중 하나를 택해 4시간 동안 에세이를 작성하면 됩니다."

    올해 프랑스 고교 졸업 시험의 철학 문제

    ―이런 에세이 문제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채점이 이뤄집니까?

    "채점관 두 명이 각각 채점해 평균을 냅니다. 의견차가 많이 나면 제3의 의견을 듣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이런 채점관의 주관적 평가를 승복하겠습니까?

    "우리는 수용하기 어렵다고 보기에 계속 '오지선다형' 수능으로 갑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젊은이들이 죽어가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입시제도는 일본을 모방한 겁니다. 그런 일본에서도 내년부터 200여개 학교에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학 진학 때 학력자격시험(SAT) 점수가 필요하지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는 학생 선발에 대해 이렇게 밝혀놓았습니다. '합격 결정은 과학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단순히 시험 성적을 컴퓨터에 넣어 그 값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각자의 원서와 에세이를 검토해서 지원자 개개인을 파악한다. 당신은 고교 시절의 평균 성적이나 시험 점수가 아니다'라고요."

    ―포스텍도 수능 성적이 아닌 '입학사정관제(학생부종합전형)'로 전원 선발합니다. 수능 성적으로 뽑았을 때보다 더 창의적인 학생들이 들어옵니까?

    "이 학생들이 당초 포스텍에만 들어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수능 공부를 다 한 학생들입니다. 오지선다형(型)의 사고에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그런 선발 방식의 결과에 이의를 제기해오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10년째 해오면서 정착됐습니다. 몇 년 전 카이스트에서 입학사정관제로 내신 10등 하던 학생은 붙고 5등 하던 학생이 떨어지자 그 부모가 총장실까지 찾아와 소동을 벌였습니다. 시험 점수가 아니면 신뢰를 못하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대학이 이를 견뎌내야 합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학부모와 학생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직업윤리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됩니다. 사정관들도 예외가 아니겠지요?

    "'정유라 사건을 봐라. 대학이 이렇지 않은가'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진통을 겪으면서도 해야 합니다. 그걸 우려해서 판을 못 바꾸다 보니 20년 넘게 이런 수능을 계속해 오는 겁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수능 점수 차이로 학생들을 줄 세우고 합격·불합격시키면 정말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우리 사회에는 '점수'가 공정한 평가 기준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래방에서도 한 곡 부르면 점수를 주지 않습니까. 완전히 '점수 사회'입니다. 그런 수능 점수를 받고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별로 바뀌지 않습니다. 포스텍 신입생 중에는 고등학교에서 이미 대학 물리를 마스터한 친구들이 꽤 됩니다. 그런데도 A학점을 받기 위해 그 물리 과목을 수강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 시기에는 소설책도 읽고 B학점을 받아도 되는데 말이지요."

    김도연 포스텍 총장과 최보식 선임기자 사진
    ―학점은 졸업 후 취직과 관계되니까요.

    "점수로 한 인간을 평가하려는 나라는 거의 한국이 유일할 겁니다. 제가 대학에서 '앞으로 ABCD 학점을 매기지 말고 '패스 앤 페일(통과와 낙제)'로 하자'고 제안하자 교수들은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행정 실무자가 '국가장학재단에서 이공계 장학금을 받으려면 학생 성적을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불발됐습니다. 점수가 늘 신뢰할 만한가에 대해 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과학 연구 과제를 평가할 때 통상 심사위원 다섯 명이 각자 점수를 줍니다. 그런 뒤 가장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를 빼고 중간의 점수 셋을 평균해 결정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게 공정하지 않습니까? 양극단은 편견이나 개인감정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과학기술 분야가 워낙 넓어 자기 전공이 아니면 심사위원들도 잘 모릅니다. 사실 극단의 점수를 준 사람은 뭔가 내용을 알기 때문에 그런 점수를 준 겁니다. 잘 모르면 그냥 중간 점수를 줍니다. 결국 내용을 아는 사람은 빠지고 모르는 사람 세 명이 앉아서 결론을 내는 격입니다."

    ―안철수 의원은 초·중·고 6-3-3년을 5-5-2년(초·중등 이후 2년 과정의 진로탐색학교나 직업학교) 학제로의 개편을 내놓았습니다.

    "국제적인 학제 기준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안 맞아요. 실제로 저항이 있고 혼란만 낳을 겁니다. 가령 한 학년이 줄어드는 초등학교에서 잉여(剩餘) 교사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학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 입니다. 현재와 같이 수능시험이 지속되는 한 초·중·고등 교육은 거기에 인질로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바꿀 수 있습니까?

    "교육부 장관이 해보겠다고 나서면 경질될 겁니다. 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대학들입니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의 총장들이 의견을 모아 '이런 식의 수능 성적은 무시하겠다'고 하면 바뀝니다. 정말 대학은 이런 문제에 고민을 좀 해야 합니다."

    이틀 뒤 나는 국어 수능문제지를 풀어봤다. 16~20번에 주어진 지문은 문장이 엉망이라 독해가 안 됐다. 더 해볼 의욕이 떨어졌다. 시험 시간의 절반인 40분 만에 손을 들었을 때는 겨우 15문항을 풀었다. 할 말이 없게도 다섯 개나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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