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에 첫 개인전을 열었죠. '사랑'이란 글자를 새긴 망치, 손잡이가 다섯 개 달린 문, 입을 수 없도록 꿰맨 세 벌의 옷…. 평단 반응은 좋았는데 하나도 안 팔렸어요. 전시 끝나고 정산(精算)하던 화랑 대표가 그러대요. 당신은 10년은 더 고생해야 할 거라고. 근데 20년 넘도록 돈 안 되는 작품만 하고 있으니(웃음)."
개념미술의 대표 주자 안규철(62·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미술시장에 본격 도전한다. 단색화 열풍을 주도한 화랑 '국제갤러리'를 통해서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안규철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展)이 관람객 34만명을 돌파하며 대흥행한 것이 발판이 됐다. 전민경 국제갤러리 대외협력디렉터는 "국내 미술시장이 커지고 컬렉터들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안규철 작가의 상업적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봤다"면서 "해외 아트페어에도 곧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 달 31일까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당신만을 위한 말' 전시가 그 첫 시험대다. 사물의 본래 기능을 변형하고 왜곡하는 방식으로 인간 삶을 성찰한다. 배 젓는 노를 4개의 다리로 삼은 '노/의자'는 21일 전시 개막과 함께 1500만원대에 구매 예약됐다. 한군데 머물러야 하는 의자가 '다리'를 저어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꿈'에 관한 이야기다.
'사물의 통역자'란 별명답게 안규철은 평범한 물건들을 통해 화두를 던진다. 헝겊으로 만든 '과묵한 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당황한 관람객에게 작가는 묻는다. "침묵의 소리를 들어보는 건 어떤가요?" '두 대의 자전거'도 엉뚱하다. 핸들은 핸들끼리, 안장은 안장끼리 붙어 있어 달릴 수가 없다. "자전거 두 대를 반으로 절단해 핸들끼리, 안장끼리 용접해 붙였어요. 오도 가도 못하는 자전거죠. 우리 삶은 어떤가요?"
'당신만을 위한 말'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뭉게구름처럼 생겨 벽에 딱 붙은 먹색의 설치물은 '고해성사'를 위한 도구다. 방음 스펀지를 채운 펠트 천 속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누구나 와서 구멍에 대고 말할 수 있어요. 비밀 혹은 푸념, 욕을 해도 되고요. 온갖 소음 속에 정작 해야 할 말,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역설적 은유입니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미술지 기자로 일하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미대에서 공부한 안규철은 글쟁이로도 유명하다. '그 남자의 가방'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등 저서가 여럿이다. 매일 새벽 스케치북에 글을 쓰거나 그림 그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안규철은, 거기 적힌 단상 혹은 드로잉을 토대로 작품을 만든다. 10개의 목조 레일을 따라 나무공이 굴러가는 설치작 '머무는 시간'도 그 산물이다. "폭우 쏟아진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요란하게 물소리가 들려요. 동네 계곡을 타고 내려가는 빗물인데, 저 물이 바로 낙하하지 않고 바위틈, 흙 사이로 스며들고 머물면서 풀이 자라고 벌레들이 큰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글로 써뒀다가…."
기왕 판매할 거 위작 논란이 없도록 작품에 흔적을 남기라고 농담하자, 안규철이 웃었다. "가격 이전에 작품이 우리 삶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거나 감흥을 주어야겠죠. 봄인데 전시가 화사하진 않아서 그게 좀 걱정이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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