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암살 동영상을 보면 김은 2.33초의 독극물 공격을 받은 후 한동안은 멀쩡했다. 김은 흐트러진 모습 없이 공항 직원들에게 손짓을 섞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경비대원이 공항 의무실로 안내할 때까지도 다리가 좀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혼자 걸을 수는 있었다. 그러다가 의무실 소파에 의식을 잃고 널브러졌다. 김이 사망하기까지 적어도 30분은 걸렸다.
▶2004년 12월 우크라이나의 야당 대선 후보 빅토르 유셴코가 "정보국에 독살당할 뻔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그해 9월 우크라이나 정보국 책임자와 저녁을 먹었다. 그 며칠 후 얼굴이 상하기 시작해 곰보처럼 됐고, 두 달 뒤에야 '다이옥신 독살 기도설'이 나왔다. 유셴코는 대통령 당선 후 정밀 검진을 받았는데 몸에서 일반인의 1만배 농도 다이옥신이 검출됐다. 소각로 등에서 나오는 다이옥신은 환경 독성 물질 가운데선 가장 독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다이옥신을 암살 무기로 사용한 거라면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이옥신은 급성 독성 물질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서서히 갑상선 등에 작용하는 '지연(遲延) 독성' 물질이다. 동물실험에선 치사량 섭취 후 죽기까지 2~6주 걸렸다. 만일 유셴코가 다이옥신 주입 몇 주 뒤에 숨졌다면 사망 원인은 오리무중이 됐을 공산이 크다. 김정남 독살 범인들도 범행 후 도주 시간 등을 벌기 위해 일부러 즉효성(卽效性)이 아닌 독물을 골랐던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2006년 11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 후신) 요원이었다가 영국에 망명했던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방사성물질인 폴로늄 중독으로 죽었다. 리트비넨코는 11월 1일 이탈리아인 러시아 전문가와 FSB 과거 동료 3명을 잇따라 만났다. 그 후 격심한 구토 증세로 병원에서 위 세척을 받았고 3주 뒤인 23일 숨졌다. 영국 보건국은 리트비넨코의 소변에서 폴로늄을 검출했다. 폴로늄은 흡입되면 인체에 머물면서 치명적 방사선을 쏘아댄다. 푸틴은 그러나 "(우리가 했다는) 아무 증거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초첨단 미량(微量) 물질 분석기는 1000조분의 1 단위 농도까지 분석해낸다. 그런데도 말레이시아 당국은 김정남 암살 독물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쩔쩔매고 있다. 미량 물질을 분석할 땐 해당 물질의 표준 시료와 대조해보는 방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 만일 북한이 신종 독물을 개발해 썼다면 표준 시료가 없어 정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가 테러를 본업으로 삼으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