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 禪院은 '침묵의 집' 아닌 계급장 떼고 맞붙는 戰場이었다"

    입력 : 2017.02.17 03:03

    ['당송 시대 선종…' 펴낸 출판사 민족사 윤창화 대표]

    출가 생활했던 저자, 9년여 작업… 唐宋 선원 생활상 생생히 정리
    "법 놓고 스승·제자간 항상 토론… 깨달은 이 안 나올 땐 탄식도"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당송시대 선원에선 좌선만 한 게 아니라 활발한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다양한 화두와 선(禪)어록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당송시대 선원에선 좌선만 한 게 아니라 활발한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다양한 화두와 선(禪)어록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김한수 기자

    1200년 전 중국 장시성(省)에서 '불교 혁명'이 일어났다. 새로 사찰을 지으면서 부처님을 모신 집, 불전(佛殿)을 없애버린 것. 대신 선사(禪師)가 법을 설(說)하는 '법당'을 중심에 세웠다. 주인공은 백장(百丈·720~814) 선사. 새로 지은 백장사(백장총림)는 중국 선종(禪宗)의 독립선언이었다. 그 이전 선종은 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 6조 혜능(638~713)을 거치며 '황금시대'를 열었지만 현실적으론 율종(律宗) 사찰에서 곁방살이 신세였다.

    최근 불교 전문 출판사인 민족사 대표 윤창화씨가 자기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펴낸 '당송 시대 선종 사원의 생활과 철학'(민족사)은 1000년 전 '선의 황금시대' 선원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한·중·일의 60여종 참고 서적을 뒤져 선원의 건축구조부터 하루 일과·1년 일정, 직제와 조직, 공부 시스템까지 망라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를 모토로 내건 선종 입장에서 사찰은 '중생을 부처로 만들고 범부를 조사로 만드는[成佛作祖]'의 장이었다. 어디서나 아무 때나 모두가 법(法)과 깨달음을 놓고 토론했다. 선승들은 긴 향(香) 하나가 완전히 타는 시간(약 40분) 동안 좌선을 하고 20분 정도 휴식했다. 좌선 중 조는 사람이 보이면 긴 막대기로 툭툭 치거나, 짚으로 뭉친 공을 던져 깨워줬다. 여름엔 매일, 겨울엔 닷새에 한 번씩 단체 목욕도 했다. 입적한 후에는 그가 지녔던 물건은 경매에 부쳐졌다. 안거가 끝나 만행(卍行)을 떠날 때에는 '여비(旅費)'로 짚신 세 켤레 값을 받았다. 그래서 게으른 선승에겐 임제(?~867)가 "짚신 값 내놔라"고 다그쳤다.

    당송 시대의 선원은 괴괴한 적막이 감도는 '침묵의 집'이 아니었다. 선승들이 계급장 떼고 맞붙어 깨달음을 겨루는 '전장'(戰場)이었다. 방장(方丈·주지)은 과로사(?)할 지경이었다. 선승들과 함께 예불과 좌선, 울력(육체노동)을 똑같이 하지만 취침 시간 이후에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던 것. 후학들에 대한 개인지도[獨參]와 추가 질의응답[請益]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수면 부족을 호소할 정도였지만 정작 더 중요한 고민은 깨달은 이가 안 나올 때이다. 백장사 주지를 지낸 법연(1024~1104)은 '하안거'(夏安居)가 끝나가는데 선승 수백 명 중 깨달은 이가 나오지 않는다며 "이러다 장차 불법(佛法)이 사라질까 걱정될 뿐"이라 탄식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선원도 변한다. 불전이 다시 등장하고, 법회 땐 '황제 만세'를 부르고 시작하기도 했다. 방장이 왕족과 관리를 접대하느라 바빠지면서 법문과 독참, 청익이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묻고 가르치기보다는 혼자 알아서 좌선하라는 풍토가 퍼졌다. 선종은 쇠퇴했다.

    저자 윤창화씨는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10여년간 출가 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다. 출가 시절부터 당송 시대의 선원 생활이 궁금했던 그는 지난 2008년부터 9년여 작업 끝에 역저를 완성했다. 그는 "끊임없이 질의응답이 오갔던 '독참'과 '청익'은 우리 선원이 되살려야 할 공부 방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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