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벙커 안에 있는 듯… 1m 앞서 느끼는 전쟁의 광기

조선일보
  • 최보윤 기자
    입력 2017.02.13 03:04

    벙커 트릴로지

    나무판자로 연출한 어두운 굴 안으로 십여 걸음 들어가면 벙커가 등장한다. ㄷ(디귿) 자로 배치된 나무 상자 위에 앉은 100여명 관객은 포연(砲煙) 자욱한 공간에서 절로 숨을 죽인다.

    26㎡(약 8평) 남짓한 무대와 객석의 사이는 고작 1~2m.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거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대사를 내뱉는 배우들 이마에 솟아오른 핏줄이나 씰룩이는 얼굴 근육이 하나하나 손에 잡힐 듯하다. "전쟁으로 부강해지는 나라는 없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대사가 핏줄과 근육을 함께 울린다.

    독일인 저격수 알베르트(이석준)는 사냥터에서 만난 영국 여성 크리스틴(김지현)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지만, 전쟁은 이 둘을 처참하게 갈라놓는다.
    독일인 저격수 알베르트(이석준)는 사냥터에서 만난 영국 여성 크리스틴(김지현)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지만, 전쟁은 이 둘을 처참하게 갈라놓는다. /아이엠컬처
    영국 제스로 컴튼 연출의 국내 라이선스 연극 '벙커 트릴로지'(김태형 연출)는 제1차 세계대전 참호를 배경으로 아서왕 전설, 아가멤논, 맥베스 등 3개의 고전을 재해석한 3부작이다. 가장 극적이라는 아가멤논 편은 지이선 작가가 원래의 대본을 거의 새롭게 매만져 비극성을 극대화했다.

    영국과 독일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최전방. 전쟁에 중독된 독일인 저격수 알베르트는 부하를 미끼 삼을 정도로 미쳐간다. 저격수로서 명성이 점점 높아질수록 그의 인간성은 소멸하는 것이다.

    여성참정권 운동에 앞장설 만큼 페미니스트였던 영국 여성 크리스틴은 알베르트의 적극적 구애로 결혼하지만, 지금은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다. 게다가 오빠들이 영국군 저격수로 참전하게 되면서, 참혹한 운명이 시작된다. 급기야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이까지 잃는 크리스틴. 포상 휴가차 돌아온 남편 알베르트에게 크리스틴은 말한다. "내가 사랑했던 그 얼굴이 아니야."

    벙커 안의 책상은 부부가 애정을 나누는 공간도 됐다가 탄피를 장착하며 살육을 시작하는 전쟁터도 된다. 전장의 알베르트와 집 안에 있는 크리스틴이 벙커 중간의 책상 양쪽에 서서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장면이 특히 돋보인다. 평화와 전쟁을 한 공간에 소화하며 관객의 상상은 극대화된다. 압권은 이미 인간성을 잃은 알베르트가 고기를 우걱우걱 씹고, 갈 곳 잃은 눈빛의 크리스틴이 사과를 먹으며 "배고파"를 반복하는 장면. 파괴된 영혼은 무얼 밀어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알베르트 역의 이석준은 입체적인 연기로 극을 장악하고 크리스틴 역의 김지현 역시 세밀한 연기로 몰입도를 높인다. 19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02)541-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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