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척추엔 총알… 머리엔 경제밖에 없었다

입력 2017.02.11 03:04

6·25 학도병 출신 이용만 前재무부 장관, 84년 인생 되돌아본 평전 펴내

원래 이름은 '이승만'
'이승만, 김구 타도' 난무하던 이북 출신
아버지가 조용히 불러 "이름 바꾸는 게 좋겠다"

갸우뚱한 왼쪽 어깨
6·25 때 총 맞고 살아나 60년간 몸엔 총알 박혀
통증 느껴질 때마다 전쟁의 기억 되살아나

열일곱 소년의 서울살이
혈혈단신으로 월남, 연탄창고가 내 집…
중앙청 첫 출근하던 날 그 뿌듯함 잊을 수 없죠

"재벌이 혼자 컸다고? 못사는 나라서 공무원 없이 어떻게…"

상사가 내 '빽'
'빽'도 없이 잘 풀린다고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해
밤낮·주말 없이 일하고 믿는 구석은 내 상사뿐

'관치 금융' 비난하지만…
나라가 돈이 없던 시절 은행에 역할 다 떠넘겨
역마진까지 강요하며 산업 자금 대주며 성장

北에 두고 온 아버지께
"서울서 혼자 대학 가고 예쁜 아내도 만났습니다"
공무원 시절 보고서처럼 아버지께 할 말 써놨죠

일제 때 태어나 6·25전쟁을 겪은 세대의 삶은 지난(至難)했다. 그중에도 이용만(84) 전(前) 재무부 장관의 인생은 유난한 축에 속했다. 남들 보기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있는 재무 관료가 되고 은행장, 장관까지 고속도로를 달려왔다. 남모르게 굽이굽이 넘은 인생사를 담으니 800쪽 넘는 '이용만 평전'(공병호 지음·21세기북스刊)이 됐다.

1933년 강원 평강군 태생. 북위 38.17~50도 이북 땅이다. 남서쪽으로는 철원, 남동으로는 김화와 맞닿은 지역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 집은 널찍했다. 아버지가 심은 뽕나무, 어머니가 놓아둔 쌀 뒤주까지 사진 찍은 것처럼 머리에 남아 있다. 부친 이봉준은 자수성가한 부농이었다. 부지런하기로 동네 으뜸이었다. 농지도 가축도 꽤 모았다. 삼 형제 중 공부 잘하고 똘똘한 둘째 아들로 자랐던 어린 시절은 따뜻했다. 그런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전 장관은 열일곱부터 남한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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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여든넷의 삶이 거울 앞에 섰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은 열일곱 나이에 북에 있던 가족과 이별하고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다. 지금도 척추에 실탄이 박혀 있고 총상 입은 왼쪽 어깨는 기우뚱하다. 1960~70년대에는 박정희표 경제개발의 실무를 담당하는 재무 관료로 치열하게 살았다. 북에서 내려오지 못한 부모에게 “이 아들이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겠다는 열망으로 살아왔다”고 마음으로 고하며 달려온 궤적이다. / 이태경 기자

어머니가 구워준 찰떡이 가족과의 마지막

―본명이 '이승만'이셨다고요.

"삼 형제인데 항렬이 승(承)자였어요. 해방되고 공산 정권이 들어서니 북한 여기저기서 '이승만, 김구 타도'를 외쳤어요. 아버지가 저를 불러 이름 바꾸는 게 좋겠다, 승용이로 할래, 용만이로 할래 물었어요. 항렬자는 언제든 되찾을 수 있겠다 싶어 용만이로 했지요. 남으로 와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생존해 있어 용만이로 살았습니다."

―북한 체제를 그렇게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학교도 안 다녔지만 동네 일 다 봐주고 열심히 일해 자신의 손으로 부를 일궜습니다. 할아버지가 사준 송아지 한 마리를 자기 밥 덜어 먹여가며 애지중지 키운 분이었지요. 동네에서 누가 제일 부지런하냐 물으면 다들 우리 집을 꼽았지요. 해방되고 공산 정권 들어서 땅을 무상몰수당하고 나니 사는 게 점점 힘들어졌어요. 한 해 농사지은 돈을 몽땅 노름해서 날리고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손 벌리던 친척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동네 인민위원회 직책을 맡아 우리 아버지한테 자아비판 하라고 나섰어요. 나는 고등학교 때 최우등생인데도 지주 아들이라고 학교 대표로 뽑히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농노 출신이라 출신 성분 좋다는 친구가 뽑혔지요. 희망을 못 갖게 하는 체제이니 사람 살 곳이 못 됐어요."

―가족이 왜 더 일찍 월남하지 못했나요.

"이웃이 가혹하게 대했으면 더 일찍 떠났을 겁니다. 지주들 쫓아내려고 집에다 물을 퍼붓고 못살게 괴롭히고 그랬는데 우리는 인심을 잃지 않은 덕에 그런 험한 일을 동네에서 당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점점 살기 힘들어지니 남하하기로 하고 1950년 1월 고향을 떠났습니다. 더 내려가지는 못하고 50리 떨어진 큰 댁이 살던 김화로 이사간 지 5개월 만에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가족과는 어떻게 헤어지게 됐습니까.

"아들들이 인민군에 끌려갈까 봐 아버지는 가마솥을 들어내고 그 밑에 굴을 파서 우리를 숨겼습니다. 전세가 역전돼 1950년 10월 국군이 김화를 점령했을 때 국군이 조직한 학도대에 자원해 들어갔지요. 공비 토벌하러 출동하는 길에 집에 잠시 들렀는데 어머니가 콩고물 찰떡 3개를 구워 주셨습니다. 부엌에 서서 얼른 먹고 집을 나섰는데 그게 어머니가 주신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김화를 비롯한 강원도 일대는 국군이 점령한 후에도 인민군 패잔병들이 인근에 흩어져 있었다. 이 전 장관의 아버지는 방공호를 만들어 아내와 남은 두 아들을 피신시킨 뒤 공사장에 강제 동원됐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공습으로 방공호가 처참하게 부서진 뒤였다. 아내와 막내아들 시신을 폐허 더미에서 찾았다. 맏아들은 척추가 부러진 채 처참한 몰골로 겨우 숨이 붙어 있었다. 학도대원으로 나간 이 전 장관은 가족의 소식을 모르다 나중에 동네 아주머니를 만나 참상을 전해들었다. 생존했다는 아버지와 형 소식도 이후로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졸지에 고아가 돼 남한 땅으로 왔다.

60년간 짓누르는 전쟁의 상흔

―38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으니 6·25 때 경험도 남달랐을 듯합니다.

"전쟁 나기 한참 전부터 북한군 남침 준비에 동원됐었습니다. 평강고급중학교 다닐 때는 수업도 안 하고 전교생이 평강역 공사에 투입됐지요. 탱크와 군용 차량이 화차에서 내릴 수 있게 플랫폼을 높이는 공사였습니다. 1948년 여름방학 때는 평강역에서 38선까지 가는 남침용 도로 건설 공사장에서 아버지와 교대로 일했어요. 6·25 터지기 며칠 전부터는 매일 밤 인민군 탱크와 트럭이 김화의 집 앞을 지나가는 바람에 땅이 흔들려 잠을 깰 정도였습니다. 전교조니 뭐니 해서 요즘 어린 학생들 70%가 '6·25는 북침'이라 알고 있다는데 정말로 우리나라 교육이 큰일입니다, 큰일."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셨다지요.

"1951년 5월 춘천 가리산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들렸는데 갑자기 왼쪽 어깨가 도끼로 내리찍는 것 같이 아파왔어요. 몸이 틀어지면서 산 아래로 몇 바퀴 굴렀습니다. 그러다 기적처럼 나무 등걸에 몸이 걸려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고 살았어요. 김창조 소대장이 달려와 다친 절 부축해 구해주었지요. 그대로 있었으면 총을 더 맞고 죽었을 겁니다. 그것 말고도 죽을 고비는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이미 죽었던 목숨이라 생각하고 살았으니 겁날 게 뭐 있었겠어요."

이 전 장관의 왼쪽 어깨는 총상으로 지금도 기우뚱하다. "양복 맞추면 왼쪽 어깨에 패드를 몇 개 더 넣어 양쪽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척추에도 실탄이 박혀 있다는 건 한참 뒤에나 알게 됐다. 제거 수술을 받다가 자칫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위험 때문에 한평생 몸에 지닌 채 그냥 산다. 잊을 만하면 극심한 통증이 전쟁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가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자신이 겪은 북한 체제와 6·25전쟁을 젊은 세대에게 꼭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라고 했다.

상이군인으로 명예 제대했지만 살 길은 막막했다. 처음엔 대전에 정착한 육촌 형의 도움을 받아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일했다. 2년쯤 지나 상경해서는 중앙우체국 서무과에서 일했다. 육촌 형 집에 얹혀 한 평짜리 연탄 창고를 방으로 꾸며 살았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 틈새로 한겨울 살얼음 같은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일해가면서 대입 준비를 해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했고, 다시 시험을 치러 고려대에 편입했다. 동년배보다 3년 늦게 들어간 대학도 일하느라 수업 빼먹고 친구들 강의 노트 베껴가며 공부하느라 바빴다. 북에서 내려올 때 가진 거라고는 입고 있던 교복, 배급받은 검은 농구화 한 켤레, 양말, 어머니가 떠준 양털 내복뿐이었다. 그래도 부지런한 부모 밑에서 보고 배운 성실함, 포기를 모르는 투지 같은 무형의 자산이 천금보다도 든든한 인생 밑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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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에 발발한 6·25전쟁에 학도대원으로 참전한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1992년 백악관에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1992년 한국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오찬을 했다.(왼쪽부터)
“내게 제일 든든한 ‘빽’은 상사야”

이 전 장관이 공무원으로 일한 18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역동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5·16 이듬해인 1962년 6월 내각기획통제관실에 자리를 얻어 중앙청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내각기획통제관실이 뭐하던 곳입니까.

“5·16 직후 신정부조직법에 따라 신설된 기관입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담당하는 컨트롤타워지요. 경제개발 계획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중앙 부처 공무원이 돼 중앙청으로 처음 출근하던 날의 그 뿌듯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가까이서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은 어떠했나요.

“1년 12달 24시간 자나깨나 경제개발과 수출에만 몰두하신 분이었어요.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지요. 어떤 일이건 기획, 집행, 평가 분석이라는 공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프로젝트를 챙기는 데 익숙했어요.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상황실이 있었어요. 높이 5m에 길이가 7~8m쯤 되는 상황판을 놓고 부처별 프로젝트의 완공 계획, 진행 실적, 문제점을 빼곡하게 표시해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했지요. 상황판을 업데이트하는 게 청와대 정무수석실 가서 내가 맡은 일이었어요. 이재과장 시절에도 서류를 잔뜩 들고 맨 뒤에 서 있으면 박 대통령이 실무자인 나한테까지 뚜벅뚜벅 걸어와 ‘수고했어’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게 박 대통령의 뛰어난 용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윗사람이 어떻게 일의 진척을 챙기고 아랫사람을 독려해야 하는지를 그때 보고 배웠지요.”

당시는 경제개발 추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출장도 잦았다. 4박5일 출장비가 3000원이던 시절 이 전 장관은 사비를 보태 1만원 들고 출장을 갔다고 한다. 동료들이 개발 현장 한 군데 갈 때 그는 두 군데 들렀다. 세 군데 다녀오라고 지시가 떨어지면 여섯 군데 다녀와서 보고서를 올리는 식으로 일했다. 일 잘한다고 윗사람한테 인정받는 게 당연했다. 1966년 청와대 서봉균 정무수석실에 파견됐는데 6개월 뒤 재무부 장관으로 부임하게 된 서 장관이 그를 재무부로 데리고 갔다.

이 전 장관이 재무 관료가 된 때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67년이었다. 6개월 만에 재경직 전환 시험을 통과하고 수재들이 모이는 재무부에서 핵심 보직인 이재국 이재2과장을 맡았다. 서봉균 장관이 떠나고 남덕우·김용환 장관이 부임한 시절에도 엘리트 코스인 이재 1과장, 이재국장을 거쳐 기획관리실장, 재정차관보로 거침없이 승진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왜 그렇게 잘 풀리냐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나는 윗사람한테 어디 보내 달라는 소리 한번 못해봤어요. 믿는 구석이 없으니, 그냥 내가 모시는 상사가 믿는 구석이라고 여기고 일했지요. 서봉균 장관이 내가 믿는 구석이고, 남덕우 장관이 믿는 구석이고, 김용환 장관이 믿는 구석이었어요.”

“재벌들, 제 힘으로 컸다고?”

―그 시절 재무부는 우리나라 돈줄을 쥐락펴락하던 정말 힘 있는 부처였지요.

“사람들이 ‘관치 금융’이라고 비난하는데 내 손으로 해서가 아니라 관치 금융을 무턱대고 폄하할 일만은 아닙니다. 한국처럼 가난한 나라가 무슨 돈으로 경제성장을 했겠어요. 나라가 돈이 없으니 은행에 그 역할을 다 떠넘겼지요. 대한민국 기업을 성장시키려고 은행에 역마진(예금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낮아 은행이 손해 보는 상황)까지 강요하면서 산업 자금을 대줬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은행의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 차이)이 적은 곳도 없어요. 배당도 못하고, 증자도 못하니 어떻게 은행이 커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낮은 금리로 대출해 기업 부담을 덜어주고 기업을 키우는 것이 일자리도 창출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믿고 추진했지요.”

―이재국장 시절도 그렇고, 재무부 장관 시절도 그렇고 당시 살인적인 고금리를 낮추는 데 앞장섰지요. 친(親)기업 정책을 편 셈이네요. 그 덕분에 성장한 대기업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섭섭하지요. 고(故)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회의 석상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 은행은 나만큼도 신용이 없다’고. 그건 아니지요. 은행이 멍들면서까지 기업 뒷바라지를 해줬는데 우리나라 재벌들은 혼자 잘해서 성장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가난하고 못 배운 부모가 뼈 빠지게 고생해 자식 뒷바라지해놨더니 그 자식이 부모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행태나 다름없어요.”

경제정책 얘기가 나오니 이 전 장관의 목소리가 엊그제 정책 집행하던 사람처럼 높아졌다. 은행을 새로 만들고 사금융을 양성화하면서 제도권 금융의 틀을 구축하던 시절이었다. 경제가 급성장하니 물가는 치솟고 자금은 늘 부족했다. 재무부는 금리 정책 등을 놓고 경제기획원이나 한국은행과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그 생각하면 지금도 화딱지가 납니다. 정책을 이상만 갖고 해서는 안 되지요. 현실은 달라요, 달라.” 당시 상황을 경제기획원이나 한국은행 출신들한테 물어보면 마찬가지로 재무부에 맺힌 응어리 때문에 갑자기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그래도 서로 ‘이게 나라 경제 살리는 길’이라 여기면서 정책 논쟁이 치열했던 경제부처의 황금기였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관료 생활은 예기치 않게 브레이크가 걸린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영문도 모른 채 사표 통보를 받았다. 재무부에 인사차 찾아온 공기업 사장을 회의 때문에 만나지 못했는데 정권 실세의 친·인척이었던 그 사람한테 미운털이 박혔다는 내막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이후 오해는 풀었지만 공직에 복직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 잘하기로 소문나 금융권에서 중앙투자금융 사장, 신한은행장, 외환은행장을 맡으며 가는 곳마다 남다른 성과를 냈다.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재무부 떠난 지 11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제35대 재무부 장관(1991~1993년)이 됐다.

“공무원 기 좀 그만 죽여라”

안보와 경제라는 나라의 두 축이 불안하다. 이런 시국에 6·25전쟁과 경제개발이라는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이 전 장관 얘기는 여러 가지를 생각케 했다. 후배 재무 관료들은 ‘이용만’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부터 꼽는다.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일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우리 후배들은 그를 돌쇠처럼 뚫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다 해서 ‘용돌이 형님’, 척추에 총탄 박힌 채 독종같이 일한다 해서 ‘총알 탄 사나이’라 불렀다”고 했다. “내 공무원 생활 35년 동안 장관을 수없이 모셨는데 후배한테 일을 제일 지독하게 많이 시킨 장관”이라고도 평했다.

―예전에 비하면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보신주의가 너무 심합니다.

“대한민국이 어렵게 일군 걸 지금 다 까먹는 것 같아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부딪쳐 풀어내야죠. 정홍원 총리 시절 원로들 얘기를 듣겠다고 해서 갔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관피아, 관피아 하는데 절대 그런 말 쓰면 안 된다. 관피아는 마피아에서 나온 말 아니냐. 마피아는 살인, 밀수, 마약처럼 못된 짓은 다 하는데 공무원을 그런 데 빗대면 어떡 하냐. 그럼 대통령은 마피아 두목, 총리는 부두목이라는 말이냐’ 그랬습니다.”

―그럼 공무원이 다시 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즘 공무원 후배들 만나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정치는 불안하지, 국회는 딴죽만 걸고 되는 건 하나도 없게 하지, 그래 놓고 일 안 돌아가면 욕은 공무원이 다 먹지. 공무원을 야단치고 윽박지른다고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일 잘하게끔 사기를 북돋워주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지요.”

팔순을 훌쩍 넘긴 요즘도 이 전 장관은 매일 체육관에서 한 시간씩 운동하고 서울 선릉역 근처 오피스텔에 마련한 개인 사무실로 나간다. 세 시간 넘는 인터뷰에도 지칠 줄 모르고 활력이 넘쳤다. 공무원 시절 보고서 만들 듯 지금도 자신의 얘기나 생각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해둔다. 그 서류 더미 속에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아버님께 보고드리고 싶었던 일’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 밑에는 ‘①아버지, 제가 서울 와서 고려대학교라는 데를 들어갔어요 ②예쁜 아내와 결혼했어요 ③62년 늦은 봄 대한민국 중앙청에 첫 출근했어요 ④72년 대한민국 재무부 이재국장이 되었습니다 ⑤재무부 장관 명을 받았습니다…’하는 식으로 순번 매겨 적어 놓았다.

월남하지 못한 아버지는 1892년생이다. 이젠 상봉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런데도 여든넷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문안 인사를 올린다. 전화(戰火) 속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열일곱 소년이 두려움 없이 세상을 헤쳐온 힘이 어디서 솟구쳤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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