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40년간 '죽음의 퍼즐' 맞춘 남자

조선일보
입력 2017.02.04 03:02

[유소연 기자의 캐치]
16년 만에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 해결… 국내 1세대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

부검한 시신만 1000구
듀스 멤버 김성재씨… 연쇄살인범 강호순…
이한열군·김귀정양 등 시국 사건도 도맡아

유족들도 참관 시켜
유치장서 목매단 사건… 절대 못 믿겠다던 유족
재연해보라고 시키기도 직접 해보니 믿더라고요

드들강 여고생 사건
16년전 시신 기록으로 피·정액 분리된 것 보고
내 피·아들 정액으로 실험 '성폭행 후 살인' 알아내

"장갑 대신 맨손이 편해… 먼저 간 딸도 내가 부검했죠"

궁금하면 끝장 본다
식당가도 주방 들어가 어떻게 만드는지 확인
의료사고 감정할 땐 해당 과 의사 일일이 찾아

법의학은 '퍼즐 맞추기'
현장 찾아가 감정하고 '칼질' 하면서 순간 포착
나는 탐정이고 형사… 사진기자 같은 사람

빛 좋은 개살구
사건 해결하면 유명해져 그런데 돈은 못 벌어요
사명감 때문에 하냐고요? 아뇨, 재밌어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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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법의학을 해온 이정빈 단국대 석좌교수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시신을 살핀다. 더듬고 냄새 맡고 색깔을 본 후에 어느 부위를 부검할지 구상한다. “시신과 현장, 사건 기록에서 최대한 많은 조각을 얻어내야 합니다.” 그가 단국대 연구실에서 사건 기록을 들춰보고 있다. / 김지호 기자
마주 보고 앉자 이정빈(71) 단국대 법학과 석좌교수는 굳이 옆자리에 앉아 달라고 했다. 갑자기 자신의 목을 누르고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10초간 숨을 참았다. 그러고는 목이 졸리는 상황을 설명했다. 기자의 팔뚝을 잡더니 "개는 가죽이 얇고 돼지에 비해 기름이 없어서 살인 사건과 관련된 실험에 딱 맞는다"고 하기도 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이 그의 설명을 돕는 소품이 됐다. 이 교수는 국내 1세대 법의학자다. 19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1000구 넘는 시신을 부검했다. 장기 미제 사건도 그의 재감정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이 교수는 16년 동안 진범을 잡지 못한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법원은 "피해자 박양이 성관계 후 빠른 시간 내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이 교수 소견 등을 토대로 김모(40)씨가 박양을 성폭행한 후 살인했다고 결론 내렸다. 앞서 김씨는 "성관계를 했지만 살해한 적은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박양의 사망 시점이 밝혀지지 않아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었다. 지난달 11일 김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지난달 18일 서울 동부이촌동 한 카페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그는 앉자마자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음료를 주문한 사이 모니터 앞에 시신 부검 사진과 인체 해부도가 쏟아졌다. 그는 신이 난 듯 30여분을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드들강 살인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나서야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자기 피와 아들 정액 섞어 실험

―어떻게 16년 만에 사건이 해결된 건가요?

"살인죄 공소시효가 없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재수사가 시작됐어요. 광주지검에서 '피해자가 성관계 후 얼마 만에 사망한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성관계 후 바로 죽었다면 김씨가 피의자인 게 확실해지는 상황이었죠. 처음엔 안 맡으려 했어요. 기록만 한 번 더 보자 하고 작년 6월 기록을 넘겨받았죠. 사건 당시 수사요원이 어떻게 체내에서 정액과 혈액을 채취했는지 나와 있더라고요. 순간 그 부분이 이상했어요. 첫 번째 채취한 거즈에서는 정액만 검출됐는데, 두 번째 채취한 것에는 혈액이 섞이지 않은 채 듬성듬성 있었다고 해요. 생리 중이었던 피해자가 성관계 후 움직였다면 정액과 혈액이 뒤섞여 있었을 거란 가설을 세웠죠."

―그 후에 어떻게 했나요?

"처음에는 실제 생리 중인 사람을 섭외해 성관계 직후 정액을 채취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았죠. 게다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거든요. 예전에 보신탕집에 가서 죽은 개를 칼로 찔러봤다가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했었거든요. 칼에 찔리면 인체 조직이 묻어나오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실험이죠. 죽은 개니까 처벌받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내 피로 실험하면 되겠다 싶어서 내 피를 뽑고 정액은 우리 아들 것을 받아서 실험했어요. 위생팩에 정액을 넣고 주사기로 혈액을 살살 밀어 넣었더니 6시간 30분 동안 놔둬도 섞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걷는 상황을 가정해 좌우로 움직이니 완전히 섞였죠. 박양 몸에서 채취된 것은 정액과 혈액이 분리돼 있었으니 성관계 당시 기절했거나 저항을 거의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성폭행 후 바로 죽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직접 실험해보는 경우가 잦나요?

"'니코틴 살인 사건' 관련해서 엊그제 의정부법원에 증언하러 다녀왔어요. 살아있는 개에게 니코틴 원액을 먹이니까 1분도 안 돼서 바로 죽는 거예요. 그걸 비디오로 다 찍었어요. 물론 이번에는 동물윤리위원회 심의를 사전에 거쳤어요. '니코틴 살인 사건' 당시 죽은 남자 몸에서 니코틴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이게 주입 후 얼마 만에 죽는지에 대한 실험이 아직 별로 없어요. 제대로 알려면 가능한 모든 실험을 다 해봐야 합니다. 감정을 할 때는 현장에 꼭 가야 해요. 현장만큼 좋은 자료를 제공하는 게 없어요. 드들강 사건도 현장에 가니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의 길이 있었어요. '아, 차 안에서 성폭행한 뒤 강으로 데려가 목을 졸랐구나' 하는 그림이 딱 그려졌어요."

―그렇게 상황이 맞춰질 때 기분은 어떤가요?

"불이 번쩍 들어오는 것처럼 '야, 이거다!' 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때의 희열이 큽니다. 내가 소견을 내고 그걸 사회가 받아주면 너무 좋죠. 검사가 피의자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고 했을 때 기분이란…. 하지만 저는 소 뒷걸음질을 치다가 쥐 잡은 격이에요."

―본인이 이 사건을 해결한 사람 아닌가요?

"제일 중요한 역할은 당시 경찰 과학수사요원이 했어요. 채취 방법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거죠. 모든 기록을 남기면 훗날 그걸 다시 읽는 사람이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경찰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해결될 줄 알고 기록했겠어요?"

―초동 수사가 부족해 안타까웠던 사건이 있나요?

"'치과의사 모녀 피살 사건'이 그랬어요. 당시 경찰이 시신이 있던 욕조의 물 온도를 재지 않아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없었죠. 초동 수사에서 할 수 있는 건 본 대로 느낀 대로 다 쓰는 거예요. 아무리 수사력이 발전해도 초동 수사가 잘못돼서 어려워지는 일은 항상 일어나요."

"부검은 정직하다"

그는 국내에서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늘 카메라 앞에 섰다. 여대생 박상은양 피살 사건(1981년)을 시작으로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1995년), 듀스 멤버 김성재씨 사망 사건(1995년),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2009년), 만삭 의사 아내 사망 사건(2011년) 등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연세대 이한열군 사망 사건(1987년), 성균관대 김귀정양 사망 사건(1991년) 같은 시국 사건도 맡았다.

―시국 사건에서 외부 압박을 받은 적은 없었나요?

"전혀 없어요. 일단 부검할 때 다른 사람 한 명을 데리고 가서 같이해요. 그러면 입 막아야 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니까요. 또 부검하는 자리에서 바로 바로 소견을 얘기해요. 옆자리에서 유족도 직접 보게 하고 최대한 많이 설명합니다. 김귀정양 사망 때는 사인이 압사라고 했다가 계란 세례를 맞기도 했어요. 그에 반해 이한열군은 최루탄 터지면서 납 껍데기가 머리로 튀었거든요. 부검에서 그걸 찾아냈어요. 여론이 어떻다고 해도 부검은 정직해요."

―유족이 참관하면 의구심이나 억울함은 많이 풀리는 편인가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면 최고라고 하고 아니면 죽일 놈이라고 하죠. 부검할 때 유족 대표가 참관하면 대개는 구석에 가 있으라고 하는데 나는 안 그래요. 사진도 찍게 하고 가까이 와서 보라고 합니다."

―유족들이 부검 결과 때문에 원망한 적은 없었나요?

"유치장에서 목매달아 죽는 사건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와요. 창살에 옷을 찢어서 목을 매는 거죠. 한번은 내가 '이 사람은 창살에 목매달아 죽은 것'이라고 하자 유족이 '그렇게 낮은 곳에서 어떻게 목을 매다느냐'며 저더러 '미친놈'이라고 해요. 내가 '죽으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한번 재연해보자. 당신이 숨 막혀 죽을 것 같으면 풀어주겠다. 납득 못 하겠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감정서에 써주겠다'고 했어요. 유족을 엎드리라고 하고 발로 등을 눌렀어요. 그렇게 1분 지나니까 그 사람이 '나 죽어요!' 하더라고요. 직접 해보면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법의학 길은 '빛 좋은 개살구'

―법의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서울대 의대 시절 강원도에서 군의관으로 일했어요. 1970년대 말이었는데 서울대에 막 법의학교실을 만들려던 시기였어요. 학교에서 법의학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저는 별로 생각이 없었어요. 대구의전 나오신 우리 아버지께서 '재미있으니 한번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아버지가 학생일 때 병리학교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검 보조도 하고 청소도 했답니다. 시작은 아버지 권유 때문이었지만 이 길 들어선 뒤로는 다른 생각 안 했습니다."

―당시 법의학교실 인기는 많았나요?

"동기생이 없었어요. 내 뒤로 5년 후배가 처음 들어왔어요. 개업의보다 돈이 안 되니 다들 안 했죠. 작년에 광주에 증언하러 갔는데 일당 6만9000원을 주더라고요. KTX 왕복 값도 안 나오죠. 이게 현실이에요. 돈 적은데 누가 하겠다고 하겠어요? 우리 아들도 의사인데 아내가 '아들은 절대 법의학 안 시키겠다. 빛 좋은 개살구다'고 했어요. 사건 해결하면 신문에 나오고 하니 빛은 좋죠. 그런데 돈은 안 됩니다."

―부인이 고생 좀 하셨나요?

"내가 쉰 넘어서까지 아버지 도움을 받았어요. 초년에는 생활비 받고요. 나중에는 애들 의복, 교육비, 식비까지 다 지원받았어요. 그럴 때 아내는 어떻게 느꼈겠어요? 개업하면 잘 먹고 잘 사는데…. 그때 25평(약 82㎡)짜리 아파트 살면서 쏘나타 한 대 굴렸었는데, 애들 둘 대학 보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개업한 동기들과 비교가 됐겠어요.

"내가 이제 막 일흔 넘었는데 일 그만둔 동기들이 많습니다. 다들 그렇게 재밌게 일했던 것 같진 않았어요. 나는 지금도 일이 너무 좋아요. 어느 날 한 기자가 '사명감 때문에 일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사명감 가지고 하면 그때부터 머리가 아파요. 재밌으면 머리가 안 아픕니다. 사건이 안 풀려도 '나는 할 만큼 했다. 머리가 나빠선지 모르겠지만 나를 다 바쳤다'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 서울대 의대에서 퇴임할 때 제의도 많이 받았다고요?

"로펌에서 오란 얘기가 있었는데 거절했어요. 1986년부터 했던 법무연수원 강의는 계속 하고, 1년에 서른 건 정도 감정 의뢰를 받아요. 그중 내가 현장도 가보고 파봐야겠다 하는 게 열 건쯤 돼요. 돈 버는 곳에 몸담으면 그만큼 큰소리 못 치고 삽니다.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러면 나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겠죠. 그렇게는 못 살아요."

태어난 해에 죽은 딸도 직접 부검

그와 얘기할수록 '성실한 직업인'이란 인상이 짙어졌다. 시신을 앞에 두고 밥 먹는 일도 그에겐 일상이다. 일하는 데 체력 달리는 게 싫어서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세 시간씩 산을 오른다고 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일을 사진기자, 탐정, 형사 등에 비유했다. 하나같이 거친 직업이다.

"수술은 잘못되면 다시 열고 이어붙일 수 있지만 우리는 한 번 칼 가고 나면 끝이에요. 칼을 대면 옆 조직에서 피가 나오니까 이게 맞아서 생긴 자국인지 알 수 없게 되죠. 재검이 없어요. '이 사람이 어떻게 죽었을까' 그림을 그려보고 어디를 부검할지 정합니다. '칼질'하면서도 순간순간 머리를 계속 굴려야 해요.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기자와도 비슷합니다."

―매일같이 망자(亡者)를 대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별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아주 고상하게 '시체는 말을 한다'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일단 시체를 보면 있는 대로 다 뽑아내자, 이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더 확실하게 알아내 보자, 그뿐이에요. 나는 웬만한 부검은 장갑 안 끼고 맨손으로 합니다. 어제까지 나와 악수하던 사람인데 왜 못 만집니까? 모든 걸 다 동원해서 냄새도 맡고 색깔도 보고 만져도 보지요."

―대개 장갑 끼고 부검하지 않습니까.

"장갑 끼고 하라고 배우죠. 나는 '장갑 끼지 않으면 절대 안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맨손으로 할 때 감이 훨씬 좋습니다. 검안할 때 머리에 혹이 있는지 구석구석 더듬어봐야 알죠. 일단 시신이 어떤지 감으로 느끼고 칼을 대는 것과 바로 칼 대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냄새도 심하게 밸 텐데요.

"냄새 뱁니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들어가도 아내가 '오늘 부검했네' 하고 귀신같이 알아요."

―가족이 냄새 때문에 꺼린 적은 없나요?

"내가 밥 먹여주는데 그런 게 어딨습니까."

―본인이 부검되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내가 남을 부검하는데 남들이 저를 못할 이유가 없죠. 사실 내 첫째 딸도 내 손으로 부검했습니다. 태어난 지 100일쯤 됐을 때였죠. 심장병으로 죽은 걸 확인했어요. 남의 식구도 하는데 자기 식구 안 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그 느낌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같겠습니까?"

―법의학을 한 마디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법의학은 퍼즐 맞추는 거예요. 널려 있는 조각을 잘 짜맞춰서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 거죠. 수사 정보와 부검 정보를 종합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상황을 재현하는 겁니다. 신기술을 많이 요하진 않아요. 얼마나 꼼꼼하고 합리적으로 짜맞췄는지가 중요해요. 꼭 의학 말고도 다른 분야의 상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생활 속 지식도 도움이 될 때가 있나요?

"그렇죠. 나는 궁금하면 끝장을 봐요. 맛있는 식당 가면 주인에게 어떻게 만들었느냐 물어보고 주방에 들어가 봐요. 집에 오면 아내에게 얘기해 만들어 봅니다. 맛이 다르면 둘이 같이 가서 또 먹어봐요. 하나가 궁금하면 끝까지 파봐야지, 적당히 하고 끝내진 않습니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물어봐요. 의료 사고 감정할 때는 해당 과 의사들에게 물어볼 일이 많죠."

―지난 40년간 일반인들이 부검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나요?

"요즘은 유족들이 부검 원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부검 안 하면 보험회사에서 돈을 안 주거든요. 경찰에서 부검 안 하면 따지는 사람도 많고요. 한국인의 죽음에도 트렌드가 있어요. 예전에는 양잿물이나 농약 먹고 많이 죽었어요. 요즘은 인터넷으로 새로운 독극물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부검의가 살펴야 할 범위도 넓어졌지요." 악수를 하자 그의 손이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망자의 한을 풀었을, 따뜻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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