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맏딸이 좋아

    입력 : 2017.02.03 03:12

    소설가 박완서에게 맏딸 원숙은 가장 가까운 말벗이자 의지처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원고 심부름을 했고, 첫 독자로서 글 읽은 소감을 전했다. 딸 향한 어머니 정성도 지극했다. 경기여중 보내려고 일본 수학 문제집 번역해 풀게 했던 일화가 딸의 산문집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에 나온다. 병마와 불의의 사고로 남편과 막내아들을 같은 해 떠나보낸 뒤 박완서는 부산 맏딸 집으로 내려가 창자 끊는 아픔을 달랬다.

    ▶가수 양희은도 맏딸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맏딸과 어머니는 애증 관계"라고 했다. "나도 그랬으니 너도 끽소리 말고 해야 한다, 뭐 이런 거." 가슴에 서로 벌겋게 생채기 내면서도 암(癌) 선고 받은 딸을 살린 건 어머니다. 버스 타고 다니며 온갖 무공해 채소를 구해 와서는 매일같이 까만 잡곡밥에 건강 반찬 만들어 먹였다. 그 어머니 그리며 만든 노래가 '엄마가 딸에게'다. '엄만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래서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바로 내 꿈이란 걸.' 

    [만물상] 맏딸이 좋아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처럼 우리 사회에서 장녀(長女)는 특별한 존재다. 장남처럼 극진한 대접 받는 것도 아니면서 맏아들 못지않은 책임감으로 부모와 동생들을 챙긴다. 산업화 시대 가족을 위해 헌신한 '공순이'들이 대개 맏딸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자기 욕망 억누르고 살아야 하니 '장녀 콤플렉스'란 말도 생겼다.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그런 맏딸의 최후가 나온다. 아버지 객사하는 바람에 가장(家長)이 된 윤경호는 어머니,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시집도 못 가보고 쉰다섯 살에 췌장암 걸려 죽는다.

    ▶내 몸 하나 앞가림하기도 힘든 요즘 이런 맏딸이 어디 있나 싶지만, 부모들은 여전히 장녀에게 마음을 의지하나 보다. 어제 나온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를 보니 나이 든 부모들이 가장 많이 만나고 의지하는 자식이 맏아들 아니라 맏딸이란다. 이렇게 된 건 단지 딸이 아들보다 살가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경제력 가진 딸이 늘고, 황혼 육아로 딸·사위와 교류가 잦아지면서 '시집간 딸도 자식'이란 생각이 굳어져서다.

    ▶'부모 부양=장남'이라는 공식도 옅어지고 있다. 실제로 아들딸 상관없이 누구든 부양해야 한다는 응답은 늘고, 장남이 해야 한다는 응답은 눈에 띄게 줄었다. 맏딸이라서, 맏아들이라서 해야 한다는 강박은 모두에게 불행하다. 형편 닿는 대로 돕고 양보하는 게 가족이다. 효(孝)도 떠밀려 하면 병(病)이 된다. 그나저나 전국의 맏아들, 맏며느리들이 화장실에서 웃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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