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태극기 群衆'이 놓치고 있는 것은

    입력 : 2017.02.03 03:13

    내 주위엔 '애국 보수' 많아
    禪畵를 그리는 한 70대 화백, 집회 참가 셀카 사진과 함께
    '눈 내리고 영하의 날에 수많은 이는 무엇 위해 이곳에 있나'라는 글 보내와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내 주위에는 헌신적 '애국 보수'가 많다. 지방 대학교수인 친구는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으로 시작되는 문자 메시지를 하루에도 몇 개씩 발송한다. 태극기 집회 안내, 집회 상황 동영상, 우파 논객들의 탄핵 반대 칼럼 등이 들어 있다. '널리 전파해 종북 좌파 세력에게 꼼짝없이 당하는 그런 우(愚)를 범하지 말자'는 코멘트로 마무리된다. 하루 내내 이런 일에 빠져 있을 그가 걱정돼 전화하니 "자네는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지금 밀리면 한국이 월남(越南)처럼 된다"며 나무랐다.

    사업을 하는 후배도 시도 때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세요. 그네 누나를 위한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문자를 보내온다. 그는 스마트폰에서 클릭할 수 있는 '오직 법치에 입각한 공정한 탄핵 심판을 지지한다'는 서명부까지 만들었다. 선화(禪畵)를 그리는 70대 후반 화백은 집회에 참가한 셀카 사진과 함께 '눈 내리고 영하(零下)의 날에 수많은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나'라고 보내왔다.

    한평생 나방을 채집 연구해온 원로 곤충학자까지 이 대열에 가세할 줄은 몰랐다. 여러 해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말마다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목청 높여 부르고, 주변 분들에게 애국 행렬에 동참을 호소하는 것밖에 더 없군요. 비겁한 방관자로 남지 않기 위해"라는 그의 문자를 받았을 때 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2016년 12월2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박사모를 비롯한 일부 보수단체 주최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이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찬바람 속에서 노년의 건강을 챙기지 않고 거리에 나선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박 대통령 지지 세력'이라는 표현을 거부했고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집회에 나가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촛불 집회를 선동하는 종북 좌파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좌파 손에 나라가 넘어가려는 것을 걱정해서 나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본의와는 다르게 '박근혜 구하기'가 나라를 구하는 것처럼 돼가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구국과 보수의 '심벌'이고, 아무런 죄가 없는 그를 언론과 특검, 정치권이 합작해 죽이고 있다고 믿게 됐다. 이제 집회 구호도 '탄핵 무효'로 집중됐다. 박 대통령이 인터넷 TV와 인터뷰에서 "그분들이 여러 고생을 무릅쓰고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해 나온다. 이런 와중에도 지지를 보내주고 응원해줘 힘들지만 힘이 난다"고 말했을 때 태극기 군중은 울컥했을 것이다.

    최순실 사태가 터진 뒤로 스무 명 가까이 구속됐다. 워낙 많은 정부 고위직이 줄줄이 불려 나오고 쇠고랑을 차다 보니,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의 구속도 그저 일상 뉴스처럼 됐다. 명색이 대한민국 장관의 무게가 이처럼 시시하게 추락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송두리째 날아갔다"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이면 민간 기업 수장도 부끄럽게 여기고 먼저 자신에게 가혹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설령 억울한 마음과 변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말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정 농단 의혹은 거짓말로 쌓아올린 커다란 산(山)"이라고 스스로 변호했다. 모든 걸 배후 기획설과 언론 선동으로 돌렸다. 물론 언론 보도의 문제는 백서(白書)를 내야 할 만큼 돌아볼 게 많다. 사실 확인에 미흡했거나 본질에서 벗어난 선정적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검찰도 시류에 편승해 언론에 흘려 흠집을 내는 수사를 했다. 이렇게 사태를 몰고 가는 방식에는 당연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시를 받던 참모와 각료들이 수북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도,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겠다고 부정하는 것은 대통령의 품격(品格)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대통령을 위해 '태극기 군중'이 추위 속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알면서도, 이들이 자신만을 지키려는 박 대통령 측의 정치적 계산에 이용당할까 안쓰럽다. 그렇게 해서 이들의 연륜(年輪)이 젊은 세대에게 조롱받는 것도 참을 수 없다. 애초에 이들은 "좌파 손에 나라가 넘어가는 것"을 걱정해 나섰지만 그런 선의가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다음 정권은 '좌파 손'에 확실히 넘어가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때문에 보수는 이미 한 번 추락했고, 이제 와서는 '탄핵 무효'에 가담하느냐 않느냐로 또 분열되고 있다. 폐쇄적 '박근혜식 보수'에 매달릴수록 현실에서 보수의 자리는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 보수'라면 보수를 새롭게 세우고 확장해가는 길에 서야 한다. 격변의 세계에서 지금 같은 국정 공백 상태를 더 길게 끌고 가서는 안 된다고 태극기를 흔들어야 한다. 헌재의 신속하고 공정한 진행에 동의해야 한다. 헌재의 판단에 맡기고 그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나라 앞에서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생명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며, 그 판결로 나라가 두 동강 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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