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추적> '어쌔신 크리드'에게는 왜 '암살닦이'란 이름이 붙었나

입력 2017.01.23 17:18 | 수정 2017.01.24 09:08

어쌔신 크리드 포스터./인터넷 캡쳐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액션 어드벤처 영화 ‘어쌔신 크리드’가 시원하게 망했다. 지난 11일 국내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22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가 35만 2000여명에 불과하다. 월드 박스오피스로도 1억 2500만 달러(약 1457억원) 투자해 현재까지 약 1억 8900달러(약 2200억원)를 벌어들였으니, 흥행이 영 좋지 못하다. 참고로 원작 게임 시리즈는 전 세계에서 7000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워낙 인상깊게 망해서인지 ‘암살닦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암살자(assassin)’에서 ‘암살’을 따고 접미사 ‘-닦이’를 붙인 표현이다. ‘암살’과 ‘닦이’를 붙여 부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나 싶겠지만, 의외로 영화 마니아 사이에서는 제법 불리는 별칭이다. 실제로 포털에 검색해보면 ‘암살닦이’가 들어간 게시물이 꽤 나오며, 일부 포털에서는 검색어 자동완성까지 된다.

세상 일이 대개 그렇듯 뭔가 이유가 있으니 이런 오묘한 별명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 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로 글에 어쌔신 크리드 스포일러는 없다.

◇오역으로 ‘반지닦이’ 된 그린 랜턴

‘닦이’는 히어로(Hero) 영화 마니아들이 망한 영화를 가리킬 때 쓰는 은어(隱語)에서 비롯됐다. 일명 ‘반지닦이’로 불리는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이하 그린 랜턴·2011년 개봉)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영화는 무슨 죄로 이런 희한한 별명이 붙었을까.

사실 지은 죄가 좀 크긴 하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린 랜턴’은 1940년에 탄생해 지금까지 연재가 이어지는 명작 히어로물이다. 이 영화는 이런 인기 시리즈의 주인공을 또라이로 만들어 버렸다.

영화 주인공인 할 조던은 공군 파일럿이던 아버지를 비행기 사고로 눈앞에서 잃고 비행기에 트라우마가 생긴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린 랜턴이 되기 전 할의 직업은 파일럿이다. 물론 원작 만화에서는 트라우마 극복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관련 연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주인공이 아버지 사건을 깡그리 잊은 패륜아처럼 보인다.

또한 설정 상 그린 랜턴으로 선택받은 이는 정체를 감춰야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누가 묻기도 전에 할이 나서서 자기 정체를 까발리고 다닌다. 친구 앞에서 변신 쇼를 벌이고, 여자친구한테 그린 랜턴 됐다고 자랑하는 식이다. 마스크는 뭐하러 쓰는지 알 수가 없다. 온 우주의 생명체가 멸망 위기에 처했는데 연애하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는 등, 이 영화 주인공이 하는 일이 대체로 이런 식이다.

주인공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영화 최종 보스인 패럴렉스는 태양을 등진 주인공을 향해 달려오다 그대로 태양에 뛰어들어 죽는다. 멈추거나 방향만 살짝 틀었어도 살 수 있었다. 막판 액션만 기대하고 주인공 똘짓을 100분 넘게 참았더니 최종 보스가 자살했다. 관객 평이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이 영화가 오역투성이 자막과 만나며 시너지가 폭발했다. 영화가 끝날 때쯤, 한 등장인물이 주인공을 떠올리며 하는 독백이 오역의 절정이다.

“모든 랜턴들은 반지를 착용했으며… 그 중엔 반지를 닦아주는 이도 있었다”
/인터넷 캡쳐

분명히 히어로 영화인데, 악역은 자살했고 주인공은 반지닦이였다. 이쯤 되면 114분 동안 대체 뭘 본거지 싶다. 원 대사는 “반지를 낀 모든 랜턴들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이가 있었다”(Of all the Lanterns who have ever worn the ring… there was one whose light shined brightest.)다. 자막은 이 중 shined를 ‘닦다’로 오역한 것이다. 보통 ‘빛나다’는 뜻으로 훨씬 많이 쓰이는 shined를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물론 정식 개봉판은 제대로 번역돼 있지만, 본토에서 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영화를 극장에서 제 돈 주고 본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이처럼 그렇잖아도 망가져 있는 영화가 기괴한 오역으로 마무리된 통에, 영화를 본 이들 머릿속에는 ‘반지를 닦아주는 이’라는 표현이 강하게 남았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정체성이 ‘반지닦이’로 굳어졌고, 여기에서 망했거나 형편없는 영화에 접미사로 붙이는 ‘-닦이’ 표현이 파생된 것이다.

◇반지닦이의 후예들

물론 반지닦이 이래 ‘-닦이’ 칭호가 붙은 게 암살닦이, 즉 어쌔신 크리드가 최초는 아니다. 사실 히어로 영화인 그린 랜턴에서 나온 표현인 만큼, 대개는 망한 히어로 영화를 지칭할 때 ‘-닦이’를 붙인다. 실제로 이 표현이 처음 쓰인 곳도 디시인사이드 히어로 갤러리다.

여담으로 히어로 갤러리에서는 히어로 장르를 대표하는 닦이영화로 ‘4대 닦이’를 꼽는다. 반지닦이, 고무닦이, 정의닦이, 자살닦이다.

고무닦이는 2015년에 개봉한 ‘판타스틱 4’다. 형편없는 액션과 발연기, 엉성한 스토리 때문에 역대 최악의 히어로 영화로 꼽혔다. 한 미국인 영화 평론가는 “영화 자체가 수치스러워! 보는 관객이 오히려 부끄럽다고!”라고 절규했다. 그런데 왜 ‘고무’닦이냐고?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 중 한명인 미스터 판타스틱이 고무 인간이어서다.

정의닦이는 지난해 개봉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배트맨과 슈퍼맨이 왜 싸우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설명을 안 하는 건 아닌데 개연성이 부족하다. 게다가 막판에는 둘이 화해한다. 배트맨과 슈퍼맨 엄마 이름이 ‘마사’로 같다는 걸 알게 돼서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그나마도 둘이 엄마가 같은 친형제도 아니다. 김미숙과 조미숙 아들이 싸우다 엄마 이름 같다고 친구 먹은 거다. 그래서 이 영화 또 다른 별명이 ‘느금마사(니 엄마 마사)’다.

자살닦이는 얼마 전 개봉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다. 수어사이드(Suicide)+닦이 여서 자살닦이다. 원작 파괴가 너무 심하고 이야기가 꽤 난잡했던 통에, 대체로 “할리퀸(마고 로비 분)만 좋았다”는 평이다. 그래도 약 7억 4560만달러(약 8700억원)를 벌어들여 4대 닦이 중에서는 가장 잘 나갔다. 이 영화, 약 7억1442만달러(약 8330억원)를 벌어들인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2014년 개봉)보다 흥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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