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똘똘 뭉쳐 꽃집… IMF 딛고 활짝

    입력 : 2017.01.12 03:04

    [IMF 20년, 해는 다시 뜬다] [6] '가족 꽃집'으로 일어난 박부호씨

    車부품업체 임원으로 일하다 IMF 풍파에 구조조정 당해
    허리디스크 아내, 두 딸과 합심
    박씨는 삽 들고 직접 공사 맡고 아내는 새벽까지 꽃꽂이 연습
    딸들은 블로그 만들어 홍보
    "경주서 꽃 포장 잘하는 집" 소문… 성수기엔 月매출 2000만원 넘어

    한보·기아 등 대기업 연쇄 부도로 시작된 1997년 IMF 사태는 삽시간에 금융권과 중소기업으로 번졌다. 살아남기 위한 기업들의 감원(減員) 도미노가 일어나면서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했다. 1996년 43만5000명이던 실업자는 IMF 직후인 1998년 149만명으로 급증했다.

    경북 경주시에서 꽃집 소진플라워를 운영하는 박부호(64)씨도 당시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자동차 부품업체 임원으로 일하다 사장실로 불려가 '퇴사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부탁하는 형태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실상 통보였다. 순간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허리디스크로 누워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박씨는 "네, 알겠습니다" 짧게 답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회사 뒷산에서 한 시간을 울었다.

    가장에겐 오래 좌절할 시간이 없었다. 일할 때 알던 하도급 업체에 재취업했다. 6000만원쯤 받던 연봉이 반 토막 났다. 8개월 동안 일했지만 이 업체 사정도 나빠져 넉 달분 월급은 받지도 못하고 다시 잘렸다. 그 후론 직장을 잡지 못했다. 일용직 노동도 해봤지만 며칠 버티지 못했다. 1년 가까이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하자 아내 최경남(59)씨가 옷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최씨는 "허리디스크 때문에 걸을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나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회상했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의 꽃집 ‘소진플라워’를 운영하는 박부호(왼쪽)·최경남(오른쪽)씨 부부가 딸 진영씨와 나란히 앉아 활짝 웃었다. 박씨는 IMF 여파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가족과 힘을 합쳐 꽃집을 차렸다. 두 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소진플라워는 성수기 월 매출이 2000만원대일 정도로 성공했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의 꽃집 ‘소진플라워’를 운영하는 박부호(왼쪽)·최경남(오른쪽)씨 부부가 딸 진영씨와 나란히 앉아 활짝 웃었다. 박씨는 IMF 여파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가족과 힘을 합쳐 꽃집을 차렸다. 두 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소진플라워는 성수기 월 매출이 2000만원대일 정도로 성공했다. /김종호 기자

    박씨는 'IMF 같은 풍파가 다시 와도 온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서 몇 달을 고민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은행원이었던 아내는 워낙 평소 꽃을 좋아했고 꽃꽂이도 곧잘 했다. '꽃집을 차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곧장 가족회의를 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꽃집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아내와 두 딸 모두 반겼다. 몇 년 만에 아버지의 생기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아둔 돈이 없었다. 가족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들었던 보험을 모두 해약하고, 두 딸 돌 반지까지 팔았다. 둘째 진영(28)씨는 "10대 땐 항상 언니 옷을 물려 입느라 새 옷을 사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화훼장식 기능사를 따기 위해 불혹 나이에 펜을 들었다. 학원에 가니 대부분 20~30대 여성이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뒤처질까 매일 밤늦게까지 400페이지가 넘는 참고서와 씨름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식구들 밥을 준비하고 옷가게에서 일하는 틈틈이 꽃꽂이 연습을 했다. 집안일과 꽃꽂이 때문에 물기로 젖은 손은 항상 퉁퉁 불어 있었다.

    그동안 남편은 직접 꽃집 공사를 했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4500만원으론 꽃집 건물을 만들기 부족했기 때문이다. 골조와 전기 배선 등 기본 작업만 시공 업체에 맡기고 나머지는 박씨가 맡았다. 직접 삽을 들고 땅을 다졌다. 벽돌을 사서 꽃집 바닥과 수도관도 깔았다. 1983년 중동에서 건설 현장 관리직으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박씨는 "몸은 힘들었지만, 45도가 넘는 사막에서 꿈에 가득 차 일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2005년 3월 두 딸의 이름 첫자를 합쳐 지은 '소진플라워'를 개업했다. 성당 교인들은 냉장고와 싱크대, 책상 등을 기부해줬다. 개업식날 하늘이 축하라도 해주듯 눈이 잘 내리지 않는 경주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개업 후엔 최씨의 화훼장식 기능사 자격증이 큰 빛을 발휘했다. 경주에서 꽃 포장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두 딸은 인터넷에 꽃집 카페와 블로그를 만들어 홍보했다. 어머니가 주문받은 대로 꽃을 손질하면 딸들이 사진으로 찍어 고객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았다. 박씨는 "꽃집은 여성 고객의 맘을 사로잡는 게 중요한데 우리 집 세 여자가 그 부분엔 도사"라고 말했다. 가게는 1년 만에 궤도에 올랐다. 지금 소진플라워는 연말연시 등 성수기엔 월 매출이 2000만원을 넘는다고 한다. 두 딸도 새벽까지 공부하는 엄마와 직접 공사까지 맡은 아빠에게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잘 자라줬다. 큰딸 소영(29)씨는 결혼한 뒤 미국에 가서 살고 있고, 둘째 진영씨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한다. 박씨 부부는 "이제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며 "소진플라워라는 가게 이름처럼 두 딸의 인생이 꽃처럼 피어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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