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키신저 만들기 프로젝트

    입력 : 2017.01.10 03:06

    임민혁 정치부 차장
    임민혁 정치부 차장
    4년여 전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부음 기사를 썼다. 당시 89세의 키신저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외신을 보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키신저가 퇴원하면서 그 기사는 버려졌다. 그는 살아났지만 국제정치 무대에서 더 이상 그가 등장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키신저는 퇴원 한 달 만에 시진핑 중국 주석의 초청을 받아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이후에도 수시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키신저를 만나 국제 정세 조언을 구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93세가 된 지금은 한 술 더 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정책·인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한다. 블룸버그는 '키신저가 주도하는 워싱턴'이 돌아왔다고 썼다.

    키신저는 40년 전인 1977년 공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 현대 외교에서 그만한 전략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에서 '전략'이란 지정학적 변수를 종합적으로 분석·예측해 큰 틀의 외교 방향을 설정하는 일을 말한다. 국제 정세가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보니 뛰어난 전략가의 주가(株價)는 치솟을 수밖에 없다.

    지난 2012년 3월 13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등 핵안보정상회의 자문단과 오찬을 함께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지금 한국에서도 전례 없는 외교·안보 위기를 맞아 '전략 부재'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실전 배치가 임박했고, 중국·일본은 경제를 무기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으며, 트럼프 시대 개막에 따른 미국발(發) 폭풍도 임박했다. 한 전직 대사는 "과거에는 전략이고 뭐고 없이 그냥 미국 뒤만 열심히 따라가면 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체계적·장기적 전략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외교에는 여전히 일이 터지면 수습하는 '땜질식 처방'만 보인다. 한 고위 외교관은 "전략적 사고를 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게 문제"라고 했다. 우리 외교관들은 그날그날의 행사·의전·행정에 치여 한발 떨어져 큰 그림을 볼 여유가 없다. 엘리트가 배치되는 주요 부서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다. 종합적인 분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윗사람들 취향에 맞게 보고서를 수정하느라 밤을 새운다. 이렇게 키워낸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짠들 전략이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략가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기대하지 말고 전략적 사고를 키우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은 2차대전 후 체계적인 전략가 육성 필요성을 느끼고 국무부에 정책기획실을 신설했다. 정책기획실은 모든 부서의 보고서를 제한 없이 들여다보고 토론을 하며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조지 케넌, 폴 니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프랜시스 후쿠야마, 폴 울포위츠, 리처드 하스 등 미국 현대사에 이름을 떨친 정책 브레인 상당수는 정책기획실에서 전략적 사고를 가다듬었다.

    이와 함께 국내 정치권도 외교·안보 전략 수립에서만큼은 힘을 보태야 한다. 당장 성과가 없다고, 당장 정파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다고 닦달하는 환경에서 제대로 된 장기 전략을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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