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과 포츠담 선언은 다른 사건"

    입력 : 2017.01.04 03:04

    '대한민국을 만든 국제회의'서 신종훈 경상대 교수가 분석
    "戰後 유럽질서 논한 회담과 달리 선언은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1943년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 1945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데 '이정표'가 됐던 국제 회담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최근 '포츠담 회담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은 서로 다른 별개의 사건'이라고 분석한 논문이 나와서 눈길을 끈다.

    신종훈 경상대 사학과 교수는 '포츠담 회담과 포츠담 선언'이라는 논문에서 "포츠담 회담은 유럽의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미·영·소 3국의 정상회담이었던 반면, 포츠담 선언은 미국의 주도로 영국·중국의 3국 정상이 일본에 대한 조건없는 항복 요구를 담은 최후통첩"이라고 말했다. "포츠담 선언은 포츠담 회담에서 중요하게 취급됐던 안건이 아니었고 회담의 공식 의제가 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최근 발간된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용직)의 연구총서 '대한민국을 만든 국제회의'에 실렸다.

    포츠담 회담에 참가한 처칠(왼쪽부터) 영국 총리, 트루먼 미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포츠담 회담에 참가한 처칠(왼쪽부터) 영국 총리, 트루먼 미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국 문서기록관리청(NARA)
    미국 트루먼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 소련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등 3국 정상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전후(戰後) 유럽 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이를 포츠담 회담이라고 부른다. 반면 포츠담 선언은 회담 기간 중인 7월 26일 미·영 정상과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 총통이 공동 발표한 문서다. 장제스는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전신(電信)을 통해 선언 참가를 밝혔다.

    신 교수는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던 스탈린이 정작 포츠담 선언에는 서명하지 않은 이유에 주목했다. 그는 "소련은 1941년 일본과 맺었던 5년 만기의 중립 조약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련은 포츠담 회담이 끝난 뒤인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신 교수는 미·영·중 3국 정상만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 이유에 대해 "미국이 성공한 핵실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핵실험 성공으로 소련 참전 이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을 가능성이 생겨나자,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주도했다는 분석이다.

    이 연구총서는 지난해 광복 70년 기념사업의 결과물로 최근 발간됐다. 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열렸던 4개 회담뿐 아니라 1919년 베르사유 강화조약부터 1941년 대서양 헌장, 1945년 UN 창설까지 다루고 있다. 연구총서를 기획한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의 뜨거운 독립 열기와 강대국 중심의 냉정한 국제 질서의 긴장과 충돌 속에서 한국이 탄생했다"면서 "한국의 광복 역시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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