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音 못 내던 소프라노, 무티의 '프리마돈나'가 되다

    입력 : 2017.01.03 03:03 | 수정 : 2017.03.27 17:41

    [2017 세계 누비는 젊은 예술가] [1] 소프라노 여지원

    세계 최고 명성 잘츠부르크 축제
    오는 8월 무티 지휘 '아이다'서 스타 네트렙코와 번갈아 주역
    한국인 소프라노론 유례없는 일
    "한국서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여기선 전혀 중요하지 않더라"

    한국 청년들에게 더 이상 국경은 무의미하다. 꿈을 펼치기에 지구는 오히려 좁다. 오페라, 발레, 미술, 국악…. 각 분야에서 일류(一流)를 넘보며 세계의 러브콜을 받는 젊은 예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무명(無名)의 한국 소프라노가 2015년 8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거장(巨匠)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베르디 오페라 '에르나니' 주역으로 깜짝 데뷔했다. 음악 애호가들은 물론, 축제 관계자들조차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소프라노 여지원(Vittoria Yeo·37). 최고의 여름 음악 축제로 꼽히는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한국 소프라노가 주역으로 노래한 건 유례없는 일이었다.

    오는 8월에도 여지원은 잘츠부르크에 선다. 무티가 지휘하는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에서 세계 최정상 소프라노인 안나 네트렙코와 여주인공 아이다를 맡았다. 지난 29일 전화 통화에서 그는 "부끄러운 얘기인데…, 실은 잘츠부르크 축제란 게 있는 줄 그때만 해도 몰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마에스트로 무티가 잘츠부르크에 같이 가자고 말씀하신 순간 저는 '아, 잘츠부르크요? 스케줄을 취소할 수 있는지 먼저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라고 답했어요." 순간 무티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우습고 민망하단다. "네트렙코가 빨간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는 '라 트라비아타' DVD를 수없이 봤지만 그 무대가 잘츠부르크인 줄 몰랐어요. 잘츠부르크는 저한텐 까마득히 높기만 한 무대였거든요."

    지난해 5월 스웨덴 스톡홀름의 로열 오페라극장에서 여지원(오른쪽 빨간 드레스)은 리카르도 무티(왼쪽)가 지휘한 콘서트 오페라 ‘맥베스’에서 여주인공 맥베스 부인을 노래해 현지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여지원은 “마에스트로 무티 앞에서 노래 한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던 그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금도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5월 스웨덴 스톡홀름의 로열 오페라극장에서 여지원(오른쪽 빨간 드레스)은 리카르도 무티(왼쪽)가 지휘한 콘서트 오페라 ‘맥베스’에서 여주인공 맥베스 부인을 노래해 현지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여지원은 “마에스트로 무티 앞에서 노래 한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던 그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금도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다. /스웨덴 로열 오페라극장

    여지원은 스스로를 '노래 못하는 소프라노'였다고 낮췄다. 클래식을 찾아 듣는 어머니가 어린 딸에겐 지루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노래 부르는 건 좋았다. 1999년 서울 성북구에 있는 서경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소프라노인데 고음(高音)이 잘 안 나와 애를 먹었다.

    '오페라 본가(本家)인 이탈리아에 가면 누군가가 나의 목소리를 꺼내주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2005년 유학길에 올랐다. '3년만 도전해 보고 이 길이 아니면 돌아오겠다'고 부모의 허락을 받아냈다. 지난 10년은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할까 고군분투한 시간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스승들은 그녀가 미처 몰랐던 특징과 장점들을 끌어내줬다.

    "제 성대엔 밝고 또렷한 노래가 어울린다면서 고음이 많은 곡을 추천해주셨어요. 스물다섯이 돼서야 고음을 내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음 빛깔은 레체로에서 리릭으로 한 톤 더 낮고 부드럽게 바꿨어요." 작은 음들을 탄력 있게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아질리타 창법도 반복 연습했다. 여지원이 말했다. "이탈리아에 와서도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었지요. 하지만 제 목소리에 맞는 연습을 부지런히 찾아 되풀이한 덕분에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전달력 좋은 표현법을 갖게 됐어요."

    기회는 갑자기 왔다. 파르마와 시에나를 거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모데나 음악학교에서 여지원은 불가리아 출신 소프라노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를 스승으로 만나 교내 음악회에 자주 설 기회를 얻었다. 이 음악회를 통해 실력을 쌓은 여지원은 콩쿠르에 나갔다가 무티 아내이자 오페라 연출로 유명한 크리스티나 무티와 만나 2013년 라벤나 페스티벌에서 오페라 '맥베스'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인연은 이듬해 잘츠부르크 축제까지 이어졌다.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여지원이 국내에 머물렀다면 지금과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저 같은 아웃사이더에겐 더더욱." 그랬던 그녀가 기회를 잡아 눈부시게 날아오르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부족함. 갈급함. 성실함." 질문을 받고 한참을 고민하던 여지원은 "한국에서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여기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덕분에 감사한 마음으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 눈여겨봤다. 살면서 기회가 몇 번 오는 것 같은데, 그 기회를 내 인생의 행운으로 낚아채는 건 결국 실력인 것 같다"고 했다.

    2015년 잘츠부르크에서 '에르나니' 공연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무티는 말했다. "너 스스로 너의 적이 되지 말아라. 너는 나의 '비장의 카드'이니까." 소프라노 여지원은 또 한 번의 비상(飛上)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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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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