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미술평론] 예술, 인류 구원의 노래를 부르다

  • 남병수
입력 2017.01.02 03:05 | 수정 2017.01.02 08:28

2016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을 경유하여, 모더니티 경험과 정동의 잠재력 사이를 사유하기

남병수
남병수

양가성의 틈새를 가로지르기

‘공적’(public)이라는 말의 함의는 비교적 분명하다. 무엇인가가 불특정한 다수에게 공통적으로 속하였음을 지시하는 언어랄까. 반면 ‘사적’(private)이라는 표현이 머금은 의미는 그에 반해선 좀 이질적이다. 개별 존재자에게만 귀속된, 오롯이 배타적인 속성을 지칭하는 언어라고 정돈한다면 옳을 테다. 두 개념은 정확히 서로 교호하며 길항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적어도, 상투적인 해설을 존중한다면 말이다.

‘아주 공적이면서도 아주 사적이라니.’ 혹 명제로 구성이 가능한 문장일까. 물론 표피적인 층위에선 양립이 안 된다. 애당초 성립불가능한 모순형용이란 빈축을 사게 될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게 간단하고 편리하게 둘 사이의 관계를 사유해선 안 될 테다. 기계적이며 도식적인 접근을 잠깐 밀쳐두고 한 차원 더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면, 어쩜 가려진 심원한 지형이 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까? 그리고 그 자리엔 과연 무엇이 놓여 있을까.

두 개념이 불화하며 부대끼는 틈새(diastema)로 벌어진 공간이 드러난다. 그리로 횡단해 들어가면 겹쳐짐의 자리, 잠정적으로 합의된 ‘양자의 공동경비구역으로’ 틈입할 수가 있다. 그 최소한의 공명점은 분명히 공적이라는 언표 안에도 그리고 사적이란 의미영역 속에도 ‘공히’ 내포된 무엇이다. 이 매개인자의 이름이 바로 ‘점유’(possession)라는 속성이다. 물론, 그보단 ‘공간성’이라는 생산적인 번역어가 한결 더 친밀하게 다가오리라. 요컨대 공적·사적이란 범주들 속에는 ‘적어도 어떤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공간성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둘 사이의 다름이란 다만 공간적인 것이 ‘풀이되고 제시되는 구체적인 방식의 차이에서’ 빚어질 뿐이다. 가름막을 세워 공간을 외부로부터 차폐시키든, 혹은 그것을 바깥으로 활짝 열어두든지.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공간성의 개입은 언제나 또 하나의 논의지형을 ‘당면한 문제의 장 안으로 자연스레 호명하고 끌어당기는’ 효과를 발생시킨단 사실이다. 마치 뿌리줄기식물(rhizome)처럼 무심코 한 부분을 당기니, 가늠할 수 없는 전체가 함께 매달려오는 꼴이랄까. 혹은 뫼비우스의 띠라든지, 동전의 양면이라는 비유도 훌륭한 참조점이 될 수 있으리라. 이 ‘그림자 영역’의 이름은 시간성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공간은 항상 시간을 머금고’ 있다는 주장인 셈. 어째서 그러할까. 이와 관련해선 한 가지 질문을 추가적으로 던지고, 또 답해 볼만한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시간은 어떻게 시간으로’ 인식되는가?

시간은 본래 ‘분절되지 않은 원시적이며 야생적인 덩어리’다. 말하자면 항구적인 연속선상의 흐름 그 자체를 지시한다. 본디 그 안에는 어떤 소음의 요소도 없다. 그러니까, 분명히 존재하되 지각될 수 없는 존재양식을 갖는 게 시간이다. 측정 될 수 없는 ‘비정형적인’(informe) 것이랄까. 그렇담 시간이 ‘어떻게 인간의 감각적 지평에서 지각될 수’ 있단 말인가? 그 흐름을 단절시키고, 일부를 절취해내어, 다시금 재-매개(re-mediation) 해버리는 순간 변화는 발생한다. 조작적인 정의과정 내지는 일련의 ‘성좌’(constellation) 빚기 작업을 통해 비로소 ‘감각화된 시간’이 탄생한다는 것. 그럼 마땅히 흐름을 잘라낼 예리한 수술의 도구가 필요할 테다. 시간의 조작과정에서 잘 벼려진 칼로 복무하는 무기, 그것이 곧 공간성의 개념이다.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극도로 고요한 원시림의 적막 속에 한 발의 총성이 들린다고 생각해보자. 총성이 울려 퍼지기 전엔 시간은 임의로 분절될 수도 지각될 수도 없었다. 비로소 날카로운 파공성이 연속적인 시간에 개입하여 그 흐름을 찢어놓는다. 시간이 파열된 자리엔 ‘공간의 감각’이 비로소 제 몸을 디밀어온다. 귀청을 때리는 소리야 금방 멎겠지만, 다물어진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한 공간의 감각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요컨대 공간성이 탄생하는 자리인 셈이다. 이를테면 이미-항상 ‘공간의 경험은 시간의 재인식과 함께’ 드러나며, ‘시간은 공간의 개입과 더불어’ 자신을 현현한다. 이것이 시공간의 뫼비우스적인 관계이다. 그렇담 공간의 경험이 항상 시간을 머금고 있다고 표현 한들 전혀 무리는 아니라는 것.

 

기입된 모더니티

기획전시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의 부제를 “1989년 이후”라는 어구로 시작하고 있단 사실은 꽤 신뢰롭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근거가 되는 시간과 공간의 대리보충(supplement) 관계를 긴요하게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그 바람에 상황이 좀 더 복잡해졌다. 새로운 문제가 불거져버렸기 때문이다. ‘1989년 이후 한국이라는’ 독특한 시공간을 호명하고 구별 짓는 행위는, 난감하게도 논의의 장에 또 한 번의 지각변동을 촉발시킨다. 지금 이 순간 발 딛고 선 ‘구체적인 현장’을 좀처럼 도외시 할 수가 없게 돼버린다고나 할까. 이른바 실재의 문제, 좀 더 분명한 언어로 말하자면 ‘동시대성의 문제’를 논의 지형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는 뜻이다.

동시대성은 모더니티(modernity)의 번역어라 할 수 있다. 모더니티 담론의 주요 논자 중 하나인 마샬 버만(Marshall Berman)의 정리를 빌려온다면 모더니티는 “어제이자, 오늘이며, 내일의” 경험으로 설명가능하다. 그의 특별한 해설은 모더니티가 단순히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님을’ 밝히 강조해준다. 다만 변화하고 있는 ‘현재적’(공시적인) 순간의 역동성, 또는 점진적인 운동성 그 자체에 윗점을 찍고 있을 뿐이랄까. 오늘날엔 오늘날의 모더니티가 있듯이, 19세기 그리고 20세기에도 제 나름의 모더니티가 존재했단 것. 그렇다면 ‘통시의 강물 안에서 반짝이는 공시적인 순간의 돋보임’이란 유사-라깡적 수식어가 혹 어울리진 않을까.

물론 공시성에만 집중하는 게 온전한 설명은 못된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버만은 모더니티를 “생동감이 넘치는 삶-경험의 양식” (mode of vital experience)으로도 설명해낸다. 그건 결코 생생한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논변이다. 말하자면 모더니티란 실존의 구체적인 순간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경험의 지형’에, 다시 말해 감각적 지평에 속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한 마디로 집약하자면 모더니티 경험은 ‘체현’(embodiment)의 문제다. 지금 이 순간 변화하는 현실의 노정 한복판에 서서, 신체의 경험을 통해 그 구체적인 꿈틀거림을 지각해내는 ‘세계감각’의 문제라고나 할까.

 

모더니티의 육화된 언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화두는 한 가지다. 과연 “1989년 이후 한국”의 모더니티 경험과 “현대미술과 사진”이라는 두 열쇠언어 사이를 어떻게 사유해볼 수가 있을까. 이 이질적인 언어들을 자신감 있게 엮어낸 저간의 사정이란 과연 무엇일는지. 아마도 그 행간을 읽는다면, ‘현대미술과 사진이야말로 모더니티를 가장 잘 현시해낼 수 있는 육화된 언어라는 해설이 스며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으리라. 허나, 정말로 그러할까. 좀 더 자세한 논증을 위해선 먼저 ‘모더니티 경험이 촉발시키는 효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티 경험에 대한 적절한 형용사적 번역은 being이 아니라 becoming과 관계되어있다. ‘지금 변화하고 있는 것’은 어떤 구조적인 정합성을 갖춘 모델로는 ‘온전하게 포섭하거나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형의 틀로 포박하려는 순간, 곧 미끄러져 내리니까. 미처 다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의 틈으로 물줄기가 쉴 새 없이 새어나오듯이 말이다. 계속적인 움직임 내부에 배태되어 있는 것은 ‘강한 추동력’이다. 이 추동력은 세계를 주형 속에 가두어 파악하려는 인식작용을 무력화하는 ‘불가능의 힘으로’ 복무한다. 세계감각 안에 ‘지각작용을 실패케’ 하는 증상적인 ‘내파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단 것. 이것이 모더니티 경험이 빚어내는 효과다. 또는 이 효과를 징후적인 굴절의 힘이라고 호명해봄직도 하리라.

“현대미술과 사진”이 정말로 ‘모더니티의 육화된 언어로’ 온당하게 기능할 수 있을까. 의문에 답하는 길은 간단하다. 현대미술과 사진이 모더니티 경험을 적실하게 ‘체현’해내는지, 그리고 그것의 징후적인 ‘굴절’ 효과를 충분히 만족하는지 되물어보면 될 일이다. 이 이상 사변적인 고민을 계속하기보다는 전시의 구체적인 면면 구석구석을 톺아가는 주밀한 접근이 필요할 테다.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 (이하: 『1989년 이후』로 명기)에 매설되어 있는 사유의 흔적들을 추적하는 동안, 과연 ‘모더니티가 현대미술과 사진이라는 장 속에서 어떻게 육화되고 있는지 소명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의도와 문제의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선 세 가지 독특한 열쇠언어에 기대어 사유의 궤적을 추적하기에 주력할 테다. 그 각각의 말들은 전시의 논리를 해부하는 도정에서 주요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아마도 삼원색과 같이 협연하여 전체적인 논의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비추어 주리라고 확신한다.

           

매체성, 표현기법, 그리고 예술적 형상의 문제

몇몇을 제외한다면 『1989년 이후』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2차원 평면작업의 형태를 취한다. 단순히 사진전이라든지 회화전의 경우였더라면 전혀 문제 삼을 여지가 없겠거니와, ‘현대미술’이 중심된 주제어가 아니었던가. 심지어는 다수의 설치미술들 역시 그 원상을 그대로 재연(replay)하는 대신, 사진매체를 경유한 2차적 전유물의 형태로 재현(representation)해내고 있다. 드물게 조형 감을 살린 작품이라 할지라도 대개는 평면부조라는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성능경, 1992) 보인다. ‘현대미술’이라는 거창한 개념을 담아내기엔 지나칠 만큼 협소하다는 생각을 좀처럼 피하기 어렵다. 혹시나 무얼 염두에 둔 다분히 ‘전략적인 장치’라면, 과연 그 복면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걸까. ‘현대미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선보일 수 있는 게 ‘2차원 예술이란’ 역설적인 확신이 아니겠는가. 달리 번역한다면 ‘2차원 평면예술이 모더니티의 육화된 언어로 성실하게 복무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리라.

모든 2차원 예술이 품고 있는 한 가지 공통형질은 ‘시공간의 박제’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건 ‘박제와 주검의 의미적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 결이 빚어내는 섬세한 다름을 감식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나 할까. 박제를 단순히 주검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뜻이다. 주검은 단순한 죽음의 결과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다. 어떤 잠정적인 가능성도 생산하지 못하는 영원한 고요와 안식 그 자체다.

하지만 박제는 다르다. 물론 박제 역시 죽음의 양식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박물관에 내어 걸린 허다한 박제들을 떠올려보라. 박제는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아니, 죽었기 때문에 새롭게 의미를 자아낼 수가 있다. 말하자면 죽음(의미의 사멸) 안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내파의 힘을 통해 ‘의미의 과잉을’ 생산해낸다. 그러니 박제는 일반적인 주검으론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죽음인 셈. 푸코가 박물관을 헤테로토피아로 간주한 것도 꼭 같은 이유다.

확실히 2차원 예술은 박제의 예술이다. 연속적인 흐름 속에 파묻힌 시-공간 연합체는, 예술작품에 의해 ‘절취되어’ 평면 속에 가두어진다. 어쩌면 생명력의 함량이 줄어든 ‘것만’ 같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리 단순하게만 생각할 건 아니다. 소위 박제된 것은 ‘그 기원적 연합으로부터 탈구된’ 대신에 ‘순간 속의 영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도리어 ‘간단없는 떠밀림’으로부터 구원받아 ‘특별한 순간을 항구적으로 보존하는 역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박제가 생산하는 이 새로운 의미적 차원은 ‘세계의 서사적 지형도’ 그 자체를 ‘감각의 층위’에서 변형해낸다. 혹 난해하다면, 좀 더 분명한 이해에 가닿고자 한 가지 유비를 동원할 수도 있다.

거대한 강의 흐름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좌충우돌 견뎌내며 제 자리를 지키는 부표를 떠올려보자. 그것이 2차원 예술의 박제와 모더니티 경험 사이를 사유할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특별히 부표가 발하는 존재감에 주목해보라. 만일 부표가 없었더라면 강의 크기에 기만되어 당장에 물이 흐르고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을 테다. 부표의 존재는 ‘현재적 순간의 물의 움직임을 자각하게’ 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부표 자신의 신체적인 ‘떨림’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마침내 그 떨림을 경유해서, 강물의 의미는 부표 자신에게 ‘새롭게’ 재해석된다. 세계에 대한 이해 자체가 ‘감각의 자리에서 굴절되며’ 변화한다. 이것이 곧 ‘시공간의 이질변형’(hetero-temporal)을 촉발시키는 ‘2차원 예술의 역능’과 정확하게 상동의 구조를 갖는다. 변형의 과정을 경유해 마침내 세계에 의미의 과잉을 생산해내는 동력 말이다.

박제, 그리고 모더니티의 체현과 굴절. 이른바 평면 예술이 갖는 고유한 잠재력이다. 미디어아트의 발전에 힘입어, 3차원 더 나아가 4차원적 다중감각 경험이 예술 활동의 준거 지평으로 확대된지도 오래다. 급진적인 팽창의 움직임 속에서 아직도 2차원 평면매체를 고수하도록 충동하는 미학적 특수성이 있다면, 아마도 박제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이 모더니티의 경험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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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후』에서 눈여겨 볼 건 비단 매체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시가 선호하고, 선택적으로 부각하는 ‘독특한 표현기법’ 역시 『1989년 이후』가 담지하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에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모더니티 경험을 구성해내는 작인으로 충실하게 기여하고 있으리란 것이다. 전시의 면면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주된 기법상의 특질은 ‘일상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방식을 동원하여 표현해내는’ 전략이다. 굳이 이런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무릅쓰며 얻어내어야 할 ‘특별한 효과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그 효과란 간단하지만 강력하다. 일상의 경험 안에 일상성을 넘어서는 ‘과잉을 개입시키는’ 것. 번역하자면 모호의 감각을 간여시킴으로써 ‘설명 가능한 세계의 지형에 변형을 일으키는’ 수행성이랄까. 만약 일련의 기법들 중에서도 특히 더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함직한 것이 하나 있다면, 본고를 통해 ‘모자이크-몽타주’라는 잠정적인 언어로 명명하고픈 특수한 표현의 전략을 들 수 있겠다. 언표의 축어적인 느낌 그대로, 이는 ‘모자이크와 몽타주의 합성어’이다.

간단히 말해 모자이크는 ‘단일한 내러티브를 품은 시각적 구성물’을 관념의 층위 또는 구상의 단계에서 여럿으로 분절시킨 다음, 그 각각의 편린에 일련의 변형을 가한 후 재조합하는 기법이다. 이 경우 변형의 물리적인 효과는 두드러지지만, 내러티브가 내포한 본질적인 속성은 거의 훼손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가령 형용어구로 명사를 수식한다고 해서 그 본래적인 의미영역이 축소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늘에 붉은 색을 칠한다고 하늘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란 뜻이다. 다만 세분과 확장을 통해 의미의 풍성함만을 기할 뿐이다. 반면 몽타주는 좀 다르다. 몽타주의 시각적 구성이란 본시 ‘상이한 내러티브에 기대고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한자리에 병치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장면 안에 어우러지는 독특한 미감을 빚어내는 게, 곧 몽타주의 미학적인 효능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이편도 저편도 아닌 경우라면 어떨까. 단일한 내러티브의 분체들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상이한 내러티브에서 기원한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요소들. 그러니까 그 각각이 분명 ‘예술적 전체의 독자성’을 갖지만, 동시에 ‘더 큰 하나를 이루는 개개의 요소’에 해당하는 소위 ‘부분-전체적인 존재들이라면’ 말이다. 본고에서 모자이크-몽타주라는 용어를 새로이 제안하는 건 바로 이런 ‘부분-전체들이 공명하며 빚어내는 색다른 표현기법을 적절하게 지칭하기’ 위해서다.

모자이크-몽타주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은 온전히 ‘자립가능’하다. 해석의 여지를 잃어버린 ‘해체된 파편조각’이 아니라, 각각이 개별적인 해석을 만족하는 ‘의미소의 권위를’ 갖는 까닭이다. 만약에 ‘콜라주와 구별되는 지점’을 논증하라 한다면, 의미소로서의 개개의 부분들 사이에 ‘끈끈한 친연성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콜라주를 이루는 요소들 역시 의미적인 독자성을 갖지만, 그들 상호 간에 ‘개연적인 연결의 가능성’이라든지 ‘유기적인 관계성’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자이크-몽타주를 집약적인 언어로 정리한다면 ‘전체들이 빚어내는 전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체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군집 역시 ‘또 다른 하나의 전체가’ 된다는 것. 이들 전체들 간에 위계는 없다. 모두가 동등한 존재지위와 능력의 함량을 갖는다. 그렇기에 연합체는 ‘의미의 유격이 없이 꽉 다물어진 독백(monologue)적 세계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 동일한 발언권을 가진 존재들이 쏟아내는 말들과 그 반향으로 충만한 대화의 세계랄까. 말하자면 다성 음악(poly-phony)적인 우주의 모습, ‘굳어지길 거부하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우주의 모습을 드러낼 따름이란 것.

『1989년 이후』의 많은 작업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연작 시리즈인 「화가의 옷」 (배준성, 2008~2009)은 모자이크-몽타주의 독특함을 잘 보여주는 전형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은 여성의 ‘누드 사진’이라는 독자적 작업물과 아크릴 물감으로 ‘재현된 고전 명작’이라는, 상이한 두 내러티브의 만남. 그러나 이 만남은 단순히 ‘불화하는 것들 간의 만남’을 지시하지만은 않는다. 동시에 ‘함께 어우러지기도’ 하면서 결국 ‘기묘한 성격의 하나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단순한 옷 바꿔 입기 내지는 카모플라주의 효과로 그 의미를 협소화해선 안 된다. 오히려 감각적 지평에 이질적인 지각요소를 틈입시킴으로 세계감각을 굴절시키고, 마침내 경험 세계의 의미를 지속해서 다시 쓰도록 추동하는 모더니티 경험의 힘을 담아내고 있다.

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각각이 ‘이질적인 내러티브에 발 딛은 중심인물들’은 ‘몸짓과 시선 전체적인 동작의 방향성 면에서 개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이처럼 불화/공명이 뫼비우스적인 관계로 얽어지는 자리에서 ‘독특한 어울림의 효과가’ 발생한다. 부분-전체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엮어지면서, 뭐랄까 ‘정의내리기 까다로운 느낌을’ 환기시킨다. ‘의미적 간극을 고스란히 품은 열린 우주’의 모습을 구성해낸다고나 할까. 탄생한 모호성은 관람객의 감각지형에 틈입하며, 이른바 세계인식 그 자체를 굴절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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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내용’(內容)이라는 말은 이미 그 바깥에 ‘견고한 윤곽 내지는 껍데기’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사실 좀 아쉬운 용어가 아닐 수 없다. 특별히 인식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감각의 변형을 추동하는 것, 그러니까 ‘껍질을 부수는 강한 돌파력’이 모더니티 경험의 존재감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말이다. ‘무엇 안에’ 담기었단 말은 ‘일정한 틀거지 범주 안에 한계 지어진’ 것이라는 뜻으로도 치환가능하다. 아무래도 ‘예술의 잠재력을 온전하게 드러내기에 좀 부족한 용어라는’ 것. 내용 대신에 ‘예술적 형상’이라는 대안적 언어를 의도적으로 채택한 건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1989년 이후』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작품들의 예술적 형상은 과연 어떤 공통감에 근거하고 있을까. 단 한마디로 축약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관람객들을 ‘흥분케 한다고’(excitable) 말할 것이다. 흥분은 감정체계를 뒤흔드는 ‘지진을’ 일으킨다. 만약에 요동치며 격변하는 동시대 현장을 일말의 흥분감도 없이 단순한 다큐멘터리의 양식으로 열거하는데 그쳤더라면, 아마 대단히 식상했을 것이다. 그런 건 근현대사를 소묘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림서적에서 누차 다루어진 형태를 의고적으로 반복한 것에 불과할 테니까. 반면, 현대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잠재력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지점에서 확실히 『1989년 이후』는 관객들을 ‘흥분케’ 한다.

구체적으로 ‘흥분’은 어떤 효과를 유발시키는가. 지진의 메커니즘을 통해 반추해 볼 수 있으리라. 지진이 도래하기 전에, 실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집의 구조를 지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흥분된 요동을 경유하여 비로소 ‘집의 형체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특별히 이 감지의 매개는 몸이다. ‘몸의 떨림센서가 잡아내는 주파수의 반향(echo)’을 구체화함으로 가능해진달까. 신체로 되돌아온 파장을 통해 ‘재매개화’된 집(세계)의 의미는 굴절된 형체를 갖는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사유를 빌려와 표현하자면 재매개화의 작용은 ‘표제 붙이기’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다. 이는 식상한 다큐멘터리식의 진술과는 엄밀하게 구분된다. 표제 붙이기는 ‘현장의 자연스런(그렇게 보이는) 흐름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고, 그 자락을 절취해내어, 달리 재인식하고 의미부여하는 방식을’ 일컫는 언어다. 자연스럽다고 간주된 것 근저에 은폐된 ‘복잡한 진실을 끌어올려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지형을 입체적으로 읽는 전략이랄까.

이렇게 표제가 붙여진 영역은 넓은 벽면 한 가운데 ‘덩그러니 홀로 칠해진 벽돌 한 조각’과 같다. 그것이 벽면 전체의 의미며 분위기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시 『1989년 이후』에 담긴 ‘예술적 형상들’은 여러 가지 모습들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변주해가면서, ‘표제 붙이기라는’ 수행적인 작업을 쉴 틈 없이 실천해낸다.

먼저 가장 주목해봄직한 예술적 형상의 표제로 ‘폭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Saturday Night」의 경우가 (김인숙, 2007) 폭로의 대표 격 사례 중 하나다. 작가는 정사의 순간을 비롯하여 오롯이 밀실의 것으로 남겨져야 하는 ‘불편한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고집’하며, 가감 없이 분명하게 현시해낸다. 또는 「동두천 기념사진」에서 다루는 양공주 문제와도 같이 (강용석, 1984) 한 칸에 은닉하여 ‘묻어둔 현실의 한 자락을 굳이 의식의 지표면에’ 끄집어내는 방식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러한 폭로의 화법은 ‘세계의 모든 껄끄러움을 거세한 채’ 만들어진 안정의 감각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감행’한다. 흥분이 거세된 자리에 구축된 진공상태는, 모더니티가 실재하는 자리가 아니다.

때때로 그 표제는 ‘도착증 또는 편집증’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고도 산업화로 급히 도약하는 시점에서 취향의 한 과도기적 전형으로 여겨졌던 ‘꽃무늬’ 신드롬을 포착하여 변태적으로 탐닉하는 「무제」 시리즈 (방병상, 1999~2001)가 있다. 콘크리트 덩어리와 굽어진 철골 등속의 건축 부산물들에 집착하며, 마치 그걸 마구 헤집어진 복부의 장기인양 세묘하는 「내장 시리즈」 역시 (노순택, 2010~2011) 유의하다. 별스럽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는 지점들에 착목하여 그것을 ‘도착적으로 탐미하는’ 작업들이다. 과연 그 효과는 무엇일까.

편집증적인 취향은 타자들에게 모종의 ‘불쾌감을’ 유발시킨다. 쉽게 말해 병리적인 태도로, 비정상적인 접근으로 간주되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어째서 하나의 개별적 취향에 대해 ‘부정적 느낌을 가져야만’ 하는가. 이는 ‘병리적인 것을 규정하고 가름하는’ 어떤 선험적인 잣대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다. 물론 이 잣대는 ‘자연화’(naturalized) 된 채 받아들여지고 있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틀이다. 도착증적 반응은 ‘소위 정상 취향’의 작동원리를 반성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표준화 메커니즘을 경험의 영역에서 중단시키고 또 굴절시킴을 통해, 세계감각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해낸다.

 ‘모순적인 겹침’ 역시 예술적 형상의 주요 표제어다. 벌거벗은 채 투명한 ‘상자 안에’ 갇혀 다시금 ‘세계 안에’ 내던져진 존재들을 그려낸 연작 「일곱 살」은, (원성원, 2010) 이중적인 공간 사이에 끼인 존재의 불편한 처지를 드러낸다. 특수/보편의 세계가 혼존하며 빚어내는 ‘불화의 감각’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나 할까. 또 문을 닫고서 내달리는 ‘도시전차의 생명력’과 더불어 푹 늘어진 갈치를 통해 ‘죽음의 그림자’를 병존시키고 있는 「생선이 있는 풍경지하철」 역시 (강홍구, 2002) 모순적인 겹침이 생산하는 ‘모호함의 감각’을 강렬하게 촉발시킨다.

이 모호함의 감각을 문화비평가 호미 바바(Homi K. Bhabha)의 개념을 전유해서 ‘혼종성’ (hybridity)으로 번역해봄직도 하다. 혼종성은 본시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의 장 안에’ 함께 거주하고 있음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물론 그 정의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이해할 수 없는 동행이 돌발적으로 길어 올리는 ‘친숙한 낯섦’(uncanny)의 효과일 테다. 굳어진 인식의 과정에 틈입해 균열을 일으키며 끝내 지형도를 다시 그리게 하는 ‘기이한 정동의 힘’, 그것의 창발적인 등장 말이다. 한복이라는 형상 안에 과거/현재, 서구/동양의 결합 불가능한 이미지들을 마치 키메라처럼 엮어낸 일군의 패션 사진들 역시 (강혜원, 2013~2014) (홍창현, 2011) (안주영, 2015) 혼종성의 모순이 도리어 생산적인 힘을 감각적으로 환기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정동, 오로지 예술만의 돌파력

모더니티 경험은 몸에서, 감각의 자리에서 ‘체현’된다. 모더니티의 체현은 신체의 ‘떨림’을 매개 삼아 이루어지며, 몸의 떨림을 경유하면서 다시금 감각적으로 ‘굴절’된다. 하지만 이 체현과 떨림, 또한 굴절의 과정은 ‘실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위의 도구적 개념들은 다만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유기적이고 대화적인 역동성’의 면면들을 강조하기 위해, 몇몇의 특징적인 언어들을 채택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 과정은 합리적 사유로 재단이 불가능한, ‘에너지의 잠재적인 추동력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단일한 언어를 동원하여 정합성 있는 개념으로 정돈해보려는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affection)이라는 임의적인 말을 혹여나 동원할 수 있다면, 이는 정동이 결코 개념어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개념적인 사고를 탈구시키는 ‘에너지의 흐름 그 자체를 아우르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정동이란 ‘인지적 판단’ 안에 ‘감성적 인식’이 개입하고 있음을, 혹 반대로 ‘감성적 인식’ 안에도 역시 ‘인지적 판단’이 간여하고 있음을 지시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적-감각적 인식작용 자체 내부에서부터 이미 벌써 그 확실성을 의심케 하는 일종의 ‘자가면역질환’(autoimmune disease)이 간섭하고 있단 뜻이랄까. 이 정동은 예술매체가 품고 있는 고유한 잠재능력이다. 비단 미술의 영역에만 속한 건 아니란 것. 가령, 시(詩)적인 경험을 연상해보자. 과연 어떤 정동이 그 과정 가운데 작용하고 있을까. 언어적 구축물인 시를 읽어내려 가다가 독자들이 별안간-문득 마주하게 되는 건, ‘문자적인 사고’의 틈새를 비집고 뒤흔드는 ‘시각적 심상(image)의 정동’이다.

이와 같이 통상적인 사고지형을 흔들어놓는 ‘떨림’의 경험이 우리 몸의 자리에서 ‘체현’된다. 나아가 몸에 체현된 이 떨림이 의미체계에 ‘굴절’을 일으킨다. 결과적으로 ‘정동의 추동력’은 이 굴절을 경유하여, 확실성의 도식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에너지의 과도한 흘러넘침’을 경험케 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며, 정동의 힘이다. 그렇다면 이 정동이 선물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기여는 무엇일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식을 넘어서는 과잉을’ 통해서 완전한 인식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정말 그게 어떤 놀라운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단 말인 걸까?

인류사 최악의 발명을 꼽는다면 기중 하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에피스테메’가 될 테다. 인간의 인지도식이며 인지작용에 상당한 권위를 부여했기에, 어쩌면 타자를 그 ‘틀’에 끼워 맞추어 이해하려는 태도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 되었다. 이 ‘정당한 태도들의 부대낌’이 인류 역사의 무대 가운데 점점이 어둡고 습한 얼룩을 수놓아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철학의 제1 과제였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그 해답을 명료하게 내어놓은 바가 없다. 그리고 사실 애당초 달성 불가능한 과업이기도 하다. 어떤 치열한 철학적 사유 끝에 내어놓는 대안일지라도 결국엔 ‘하나의 새로운 인식론적 틀로서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해체의 해체란’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공허한 언어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동이라면 가능하다. 정동의 원리를 품고 있는 예술이라면 가능하다. 철학이 실패하고 불탄 자리에서, 바로 이 예술적 정동이야말로 인간이 ‘인식의 억압과 굴레를 돌파하고 자유로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새론 희망을 제공하리란 것. 기획전시 『1989년 이후』가 제공하는 미덕 역시 이 점에 잘 닿아있다. 모더니티 경험을 경유하여, 예술이 품은 정동의 잠재력을 잘 현시해주었다는 사실이랄까. 따라서 『1989년 이후』가 갖는 진정한 의의를 범박한 언어로나마 축약해본다면 다음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술, 인류 구원의 노래를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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