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일엔 늘 '도전'하세요

입력 2016.12.19 03:03 | 수정 2016.12.19 09:42

자신만의 길 찾은 선배 3인의 조언

진로 교육이 교육계의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직업 찾기는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경제도 어려워지면서 ‘뭘 하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진로에 대해 뭐라고 조언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기만의 길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인생을 그리고 있는 선배들에게서 직업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이경호 기자·장은주 객원기자
이경호 기자·장은주 객원기자

◇시간을 의지대로 운용하는 사람

“아침에는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전 11시쯤 돼야 일어나거든요.”

윤이나(33)씨의 말이 날아와 귀에 꽂혔다. 오전 6시에 일어나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구겨넣고 출근해 일을 시작한 지 10시간이 넘은 시점이었다.

윤씨는 자기 의지대로 시간을 운용한다. 평론가·기자·편집장·작가·PD·사장(가방 제작자)…. 하루에도 여러 직함으로 불리며 이곳저곳에서 일하지만, 소속된 회사가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면서 과외를 시작으로 장·단기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일급이나 월급을 받으며 살아왔다. 지난 14년간 한 일이 닭 가공·선글라스 판매·꽃 포장·방청·서빙 등 서른 가지쯤 된다. 마트에서 초콜릿 판매왕도 여러 번 했다. 지금은 주로 프리랜서 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방송국 PD 시험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한 매체에 글을 써 원고료를 받았고, 이후 원고 청탁이 하나둘 늘며 본격적으로 글 쓰는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회사에 소속됐을 때 주어지는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단지 그걸 위해 제 컨디션에 맞지 않는 근무 패턴과 불필요한 책임을 감수하기 어려웠던 거죠.”

윤씨는 어릴 적부터 학생회장을 맡아 남들을 잘 이끌었고, 성적도 좋아 성균관대를 조기 졸업했다. “많은 우등생이 부모 기대 때문에 자기 적성을 찾기 보다 ‘멋진 직장’ ‘안정된 직업’을 얻는 데 집중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부모의 바람을 모두 충족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습니다.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아 해결했고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벌었죠. 그래서 부모님도 제 일에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는 “청소년에게 꿈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전 방송사 PD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안 됐죠. 하지만 어떤 꿈은 능력이 있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 목표는 재미있게 사는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일에도 도전해보고요.”

◇다양한 경험이 질 좋은 결과를 낳는다

지난해 문을 연 심플프로젝트컴퍼니는 음식 아이템 검증부터 장소 물색, 시설 제공, 유통 채널 소개까지 음식점 창업에 대한 모든 것을 도와주는 스타트업이다. 김기웅(36) 심플프로젝트컴퍼니 대표는 “식당 여는 것을 참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창업하는 식당 중 절반이 1년 안에 문을 닫는다. 우리 회사는 외식 창업 실패 확률을 줄이고, 실패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목표를 둔다”고 설명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야 합니다. 생각만 해선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아요. 계획을 아무리 꼼꼼하게 세워도 실전에서는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시행착오를 최소로 하면서 부딪혀야 발전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김 대표가 살아온 방식과도 맞물린다. 그는 세 살부터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 ‘영남이’로 출연한 아역 배우였고 초·중등 때는 프로를 꿈꾸는 축구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다 부상 등으로 고교 때 운동과 연기를 모두 그만두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대학에 진학했다. 각종 알바를 닥치는 대로 했고, 대학 시절 이미 만화방·포장마차 등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우연히 들른 곳에서라도 ‘이게 돈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당장 알아 보고 뛰어들었다”고 했다. 군대에선 틈틈이 취업 준비를 했다. 전역 전 2008년 이미 증권사에 입사에 성공했다. 일을 하다가 일본 장기 불황 때 가정간편식이 활황이라는 정보를 듣고 창업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났다. 2014년 증권사를 나와 도시락 배달 가게를 차렸고 이 과정에서 중소 규모 음식점들의 고충을 알게 됐다고 한다. “작은 가게들이 모여 주방이나 인력을 함께 쓰면 고정 비용을 줄일 수 있겠더라고요. 우리 회사의 주방 공유 시스템 ‘위쿡’은 이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어요. 여러 아이템이 모이면서 지금 회사의 모습을 갖추게 됐고요.”

그는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남의 눈을 신경쓰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경험해보라”고 조언했다. “질(質)은 양(量)에서 나옵니다. 경험을 많이 할수록 좋은 결과에 다다를 확률이 높아집니다. 우리 회사도 다양한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나온 결과고요.” 다만 김 대표는 요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진로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직업을 잠깐 체험한다고 해서 그 직업을 알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건 ‘통제된 경험’이죠. 직업 이면에 너무나 많은 모습이 있잖아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같은 ‘날것의 경험’을 많이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가슴 뛰어"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우동 가게 기리야마 본진. 이곳의 신상목(46) 대표는 약속 시각인 오후 1시 반에서 15분이 더 지나도록 나오지 못했다. 주방에서 국물 우리고 계산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젖은 앞치마를 입은 모습에서 전직(前職) 외교관인 그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 대표는 1996년 제30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외교관으로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다가 2012년 핵 안보정상회의 의전기획과장을 지내고 사표를 던졌다. 2000년 일본에서 우연히 들른 식당 '기리야마'를 2006년 다시 방문했을 때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한 게 계기였다고 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 있다가 6년 만에 간 식당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어요. 무려 3대째 100여 년 간 그 모습, 그 맛을 잇고 있는 '머무름의 미학'과 '장인 정신'을 한국에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신 대표는 "지난 4년은 사회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2014년 세월호, 2015년 메르스, 2016년 김영란법까지 해마다 생각지 못한 사회 이슈로 매출이 바닥을 치곤 했다. "돈 버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당장 생계를 꾸려야 하고 책임질 직원들이 있으니 무엇이든 조심스럽죠. 그러니 '그것을 지금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몇 주, 몇 달간 고민해 봐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실행에 옮겨도 늦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 설렌다고 했다. "단조로웠던 공무원 생활에 비하면, 내 판단에 의해 생물(生物)처럼 움직이는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신 납니다. 국물 맛이 제 손끝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게 지금도 신기해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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