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김영한 비망록'은 증언한다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입력 : 2016.12.17 03:04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 보니 김기춘 전 실장이 '사랑방 대통령'
    만사를 통제·응징·문책하려다 결국 대통령 탄핵에까지 이르러
    대통령 뽑을 때 시간·관심 들였듯 내려오게 할 때도 절차 지켜야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이 남긴 비망록을 매일 한 번씩 읽고 있다. 2014년 6월 23일 시작돼 2015년 1월 23일 끝나는 비망록은 달력까지 포함해 200쪽 분량이다. 말이 비망록이지, 청와대 업무 수첩에 수석비서관 회의 참석자들의 발언을 급히 받아 적은 것이어서 개인적 소회를 쓸 여유가 없다.

    지난 일요일 비망록 복사본을 받아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듯 읽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읽는 횟수가 늘 때마다 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정보가 행간에서 툭툭 튀어나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7개월이지만 이 기록만큼 대한민국 최고 권부(權府)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비망록의 주인공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고 김 전 수석이 '장(長)'이라고 표기한 그의 지시는 국정을 종횡무진 오간다. 검찰·법원·헌법재판소·정부부처·언론·기업뿐 아니라 통합진보당·전교조, 심지어 지방자치단체의 대소사까지 정보를 수집하고 진단을 내리며 처방까지 내리는데 경륜이 가히 천재급이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다. 그는 청와대 비서의 임무를 '대통령을 지키는 근위병이요 호위 무사'라고 규정한 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常食化)'라는 4대 노선까지 제시했다.

    '영(領)'으로 표기된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는 수준이 확 떨어진다. 몇 차례 지시는 김 실장이 했던 말의 반복이며 '휴가 많이 가라' 'live and learn'(살며 배운다) 말 옆에 뜬금없이 영국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이라고 적혀 있다. 휴가 가서 읽을 만한 추리소설을 권유한 것 같다.

    비망록에는 박지만·정윤회·박관천, 문고리 3인방, 십상시(十常侍)의 실명부터 박 대통령이 탄핵 직전 임명한 조대환 민정수석과 검찰의 주요 간부 내사 내용도 나온다. 최순실의 최측근으로 김기춘 실장이 '꽃뱀'이라 표현한 '밍크 장사' 김모씨와, 정윤회 문건 파동 때 등장한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에 전 국세청장 이름까지 나온다.

    비망록에는 '귀빈(박근혜 대통령) 및 가족 일반'이라는 인쇄물이 첨부돼 있다. 이것은 대통령의 동선(動線), 비공식 접견 장소·시간·내용, 친·인척, 식자재 공급처, 피복 선호도 및 구입처(업체), 개인 일상용품 구입처, 의식주 관련 습관을 '근위병이요 호위 무사'들이 전부 파악해 기밀로 다뤘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망록에는 분명 '최순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윤회와 밍크 장사 김모씨와 피복 구입처 등까지 알면서 최순실을 몰랐다는 김기춘 전 실장의 증언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비망록에서는 '세월호'가 다뤄지지 않은 날이 없다. 그때마다 김 전 실장은 '사라진 7시간'을 포함해 모든 대응 논리를 하달했다.

    비망록은 '안방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면 '사랑방 대통령'은 김기춘이었음을 증언한다. 문제는 그 '천재'가 모든 걸 통제하고 응징하고 독려하고 문책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세상은 결코 기획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러다 보니 그의 선의(善意)는 어느 순간 악의(惡意)로 변해 대통령 탄핵까지 떠내려오고 말았다.

    소위 '촛불 민심'은 대통령 탄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즉각 하야'를 외치고 주사와 약제와 수술까지 들추며 온 세상을 다 불태울 태세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을 뽑을 때 돈과 시간과 관심을 들였듯 내려오게 할 때도 확인과 검증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그게 지켜보기 괴로울수록 더 인내해야 한다. 1987년 6·10 항쟁이 한국의 민주화를 가져와 30년을 지탱했다면 2017년에 특검과 헌법재판소에서 나올 진상(眞相)과 결정을 지켜보고 국격(國格)을 한층 높여 또 다른 30년을 떠받칠 복습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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