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러슨의 깜짝 발탁이 모스크바에는 '흥분'을, 동유럽 국가 수도에는 '공포'를 몰고 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3일(현지 시각)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최고경영자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첫 국무장관에 지명되자 유럽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푸틴의 친구'로 불리는 틸러슨이 오바마 행정부와 정반대로 미국 외교 노선을 '친(親)러시아'로 바꿔놓으면 유럽 정치·외교 근본 틀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와 나토(NATO)를 통한 군사적 대응 등에서 미국과 손발을 맞춰왔다. 하지만 틸러슨 지명으로 모든 상황은 돌변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양자 회담에서 "대러 경제 제재 연장"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직후 트럼프는 틸러슨 지명을 발표했다. 틸러슨은 "대러 제재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미국과 유럽의 대러 공동 전선에 엇박자가 예상된다.
중국도 트럼프 행정부가 '친러 반중'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중·러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해외판 SNS인 '협객도(俠客島)'는 이날 '푸틴의 절친을 국무장관으로 앉힌 트럼프, 연아제화(聯俄制華·러시아와 손잡고 중국을 억제하다)에 나서나'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협객도는 "대선 기간 내내 러시아와 관계 회복을 공언했던 트럼프가 틸러슨 내정을 통해 그의 구상을 현실화시켰다"고 했다.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도 "틸러슨이 국무장관이 되면 중·러 관계가 훼손될 것이란 전망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국제 전문가들은 틸러슨 국무장관 지명으로 미·러 관계가 급속히 호전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 브루킹스연구소 토머스 라이트 연구원은 "틸러슨의 선택은 트럼프가 러시아를 압박하기보다 거래를 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트럼프가 러시아와 진정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걸 보여준 신호"라고 했다. 트럼프도 이날 틸러슨 발탁 배경으로 "(러시아 등)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 지도자들과도 연결된 폭넓은 인맥 때문"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면 반(反)러시아·동맹의 중요성 등 국제 정치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란 전망은 최근 주요 인사를 통해 빗나가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오히려 트럼프가 오랫동안 그려온 '큰 그림' 속에서 '친러반중' 기조를 구체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지난해 7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도록 놔두면 안 된다는 조언을 수없이 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렇게 방치했다"고 했다. 오바마 정부가 러시아와 갈등을 빚어 결과적으로 중·러 밀착을 도왔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유럽은 나토마저 흔들릴까 봐 우려한다. 트럼프는 선거 때 "(나토는) 용도 폐기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에 친러 국무장관 지명이 이뤄지면서 발트 3국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줄 방패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며 극도의 불안감에 빠졌다.
반난민·반이슬람 성향의 트럼프 세계관이 유럽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트럼프가 내년 유럽 각국 선거에서 극우·포퓰리즘 정당·후보를 지지할 경우 미국·유럽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했다.
중국도 틸러슨 외교팀의 등장을 '위협적'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에 맞서 러시아와 밀착해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다른 모든 나라를 제치고 러시아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푸틴 대통령과 지금까지 20차례 이상 만났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침공으로 경제 제재를 받고 있던 2014년에는 4000억달러(약 467조원)어치의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30년간 도입하는 초대형 계약으로 측면 지원에 나섰다. 그 결과 중·러는 북핵 문제와 사드 문제, 시리아 문제 등에서 한목소리를 내면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중국은 트럼프의 새로운 외교 전략으로 이런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는 미국에 대한 경제 보복, 군비 증강 주장 등 강경 맞대응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환구시보는 "트럼프의 '하나의 중국' 흔들기는 미국의 오만이며 그 오만의 근거는 군사적 우위"라며 "중국도 이에 맞서 군비를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군사 예산을 늘리고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41의 배치와 전략 핵 잠수함 장기 운용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군사 전문 매체 IHS제인스는 "중국의 군사비 지출이 오는 2020년 2330억달러로 추산되며, 이는 2010년 1230억달러의 두 배 가까운 규모"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