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북정마을은 시인 김광섭의 작품 '성북동 비둘기'의 고향이다. 마을로 올라가는 언덕길엔 이 시가 적힌 비둘기공원이 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는 시의 첫 구절처럼 사람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여기에 달동네를 이루고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찌그러진 양철 문과 시멘트벽, 비닐로 가린 구멍 난 지붕을 보면 40여년 동안 시간이 멈춰 선 듯하다. 한양 성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 연인들이 자주 찾지만 그 흔한 카페 하나 없다.

동네 사람들은 지난 25일 아침에도 만남의 장소 격인 가게 앞에 모여 난롯불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옆으로 1.5t 트럭 한 대가 섰다. 작업복에 주황색 조끼를 입은 문태열(61)씨가 차에서 내려 "얼른 모입시다. 연탄 1500장 옮기려면 한참 걸려요"라고 소리치자 같은 차림의 남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북구청의 위탁을 받아 동네 정화조 분뇨를 수거하는 한일정화·청수실업 소속 청소부 10명과 정년 퇴직자 2명 등 12명이었다. "우리끼리는 서로 '똥 퍼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이들은 평균 연령이 50대 후반이 넘는다. 무료 연탄 배달 봉사는 3년 전 '한마음 봉사회'를 만들면서 시작했다. 이날도 독거 노인이 사는 7가구를 위해 회비 87만원을 들여 연탄 1500장을 마련해왔다.

서울 성북구의 정화조 청소 업체 직원들로 이뤄진 ‘한마음 봉사회’ 회원들이 지난 25일 오전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성북동 북정마을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이날 회원들은 이 마을 독거 노인 7명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연탄 1500장을 전달했다.

현재 북정마을엔 509가구 1120명이 살고 있다. 노후한 주택이 65%에 육박하고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비중이 40%에 이르는 달동네다. 빈집도 40곳이 넘는다. 매일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정경철(65)씨는 "골목길이 구불구불하고 가팔라 호스를 150m 넘게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길이 워낙 좁다 보니 연탄을 나르기도 쉽지 않아 폭 40㎝ 정도의 작은 리어카를 특별히 제작했다. 두 명이 앞에서 리어카에 묶은 밧줄을 끌고 세 명이 뒤에서 밀었다. 나머지 회원들은 품에 연탄 두 장씩을 안고 뒤따랐다. 15분 만에 김옥순(86) 할머니 집 마당 한편에 200장을 다 쌓았다. 골목길 끝에 다다르자 김순제(88) 할머니 집이 나타났다. 리어카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골목이 좁았다. 집 안도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부뚜막 옆엔 묵은 연탄 수십 장이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회원들은 연탄을 정리하면서 새 연탄 200장을 쌓았다. 할머니는 "안 그래도 작년에 연탄이 무너져 몇십 장 버렸어"라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김 할머니 집 앞에선 성북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위로는 달동네가, 아래로는 고급 빌라·단독주택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아랫마을 성북동은 기업인들과 연예인 등 부유층이 사는 동네다. 회원들은 "음지와 양지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는 곳이 없지만 북정마을엔 뭔가 따뜻함이 있다"고 했다.

문씨는 "몇년 전부터 작업을 하러 왔다가 어렵게 사는 노인들을 보곤 봉사회를 만들었다"면서 "회원 두셋이 시간 날 때마다 와서 빵을 나눠 주거나 도배를 돕곤 했다"고 말했다. 봉사 활동비는 월급에서 2만원씩을 떼어 모으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반쪽 리어카로 골목을 누빈 지 3시간 만에 연탄 배달을 끝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나누며 살고, 그것도 부족하면 몸으로 때우는 것이 신조"라는 '똥 퍼 아저씨'들은 "주민들이 모두 이번 겨울은 따스하게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